유난히 청명한 가을날(10월 둘째 주). 군산기네스에 등재된 문봉식(83)씨를 만나러 댁으로 향했다. 손녀를 마중 나온 듯, 온화한 미소로 반겨주는 인자하고 다정한 모습이 마치 친할아버지를 연상케 했다. 방금 찐 고구마가 탁자에 놓인다. 이야기는 고구마 속살처럼 부드럽게 시작됐다.
"일제시대, 폭격이 난무하는 전쟁 속에서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저를 찾으셨어요. 하루하루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통받고 있으니 네가 누구의 자손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건넨 게 바로 족보입니다. 이 족보를 보고 기록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알게 됐죠. 그래서 그 즈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가장 오랜 된 일기는 1948년도 때 작성한 종이 한 장. 그 전부터 일기를 써왔을 거라 추정하지만 있을 리 만무. 대략 20살 때부터 일기를 써왔던 걸로 계산하면 지금까지 63년 간 일기쓰기를 생활화한 셈이다. 하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 그는 부득이한 경우, 후기(다음날 씀)를 쓰거나, 짧은 문장으로나마 하루일과를 기록하고, 자신이 느낀 감정들을 솔직히 표현했다.
"일기란, 자신표현의 광장이자,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이곳에선 아무런 제약 없이 모든 감정들을 쏟아 낼 수 있죠. 어떨 때는 스트레스 해소의 장이기도 해요. 무엇보다 하루하루의 기록들이 모여, 제 삶의 역사가 된다는 점이 대단히 가치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63년 간 그가 쓴 일기는 다섯 칸 책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권수로만 봐도 100여 권은 족히 넘어 보인다. 이 일기첩에는 그의 일상과 가족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군산의 발전상도 드문드문 반영돼 있어 소중한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시대흐름에 따른 노트의 변천사도 살펴볼 수 있어 기록물적인 가치는 더 높다.
일기 읽는 게 소설책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그는 요즘 아내가 잠든 시간, 조용히 서재로 나가 지난 일기를 읽어내려 간다. 그땐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또 왜 그렇게 옹졸했는지 지난날을 반추해 보면 자연스럽게 엷은 미소가 지어진다.
군산기네스에 등재되고 나서 연일 취재요청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그.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걸려오는 전화로 이미 유명인사는 다 됐다. 그는 "단지 자신의 일기를 써내려갔을 뿐인데, 대단한 인물인양 치켜세워줘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자신을 한없이 낮췄다.
사실 '63년간 일기 쓴 것'보다 더 대단한 타이틀이 그에겐 많다. 우선 옥구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개교 29년 만에 처음으로, 전주사범대학에 당당히 입학했다. 그때 당시 동네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열렸고, 신문사에서는 그를 군산의 유망주로 수차례 인터뷰했다.
이후 교사가 된 그는 25살 젊은 나이에 최연소 교감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교감 17년, 장학사 5년, 교장 20년으로 무려 42년간 교육행정가로 활동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2개(목련장, 동백장)나 받는 영광을 누렸다. 현재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기림문학회 회장이자 시인으로서 세상과의 소통에 한결같은 열정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시간 남짓 대화. 어느덧 저녁을 알리는 배꼽시계가 울린다. 한사코 거절하는데도 집에 온 손님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인심좋은 노부부와 함께 소박하고 정갈한 밥상에 나란히 앉았다. 온기 가득한 밥 한 숟가락을 뜨며 '그의 일기장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쓰여질까' 생각하니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이 절로 든다.
덧붙이는 글 | *군산기네스란? 군산시가 개항 111주년을 맞아 군산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발굴, 보전하기 위해 '군산 기네스' 등재 대상을 선정했다. 지난달 27일 발표된 군산기네스는 8개 분야에서 109건이 등재됐다.
2010.11.10 17:13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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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63년간 100여 권의 일기를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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