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처후
독립기념관
"나의 지극히 사랑하고 믿는 여러 형제자매들은 이 세상에 금 같은 시간을 허비하여 이 글을 한 번 보시고 우리가 다 장래에 어찌해야 좋을 것을 생각합시다. 우리가 서로 각 처 원방에 산재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나 마음과 뜻은 서로 상통돼 고국을 사랑하고 불쌍한 민족을 구제코자 하나 그러하나 각 지식과 학력이 천단하여 날마다 근심하고 탄식만 하니 그러하면 아무 유익도 장래에 없을지니 우리가 서로 알고 생각나는 대로 신문 상이나 잡지 상에 기재하여 돌려가며 보고 지식을 서로 바꾸는 것이 제일 합당하는 줄 아나이다. (중략)오늘날 우리의 급히 하고 먼저 힘쓸 것을 '철학'이라 하겠소? 아니오.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데 '철학'은 어느 곳에 쓰겠소? 그러면 '신학'이라 하겠소? 아니오. 시방 이 압제 중에 무슨 말로 전도하겠소? 좋은 사람이 천당에는 나중에 갈지라도 목전에 심한 압제를 받을 수 없소이다. 그러하면 '농업'이라 하겠소? 아니오. 저 악한 자들이 사처에 편만하여 좋고 기름진 땅은 무리히 탈취하니 농업을 임의대로 하겠소? (중략) 우리의 토지를 빼앗는 자 일인이요, 우리의 생업을 빼앗는 자 일인이요,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자 일인이요, 우리의 생명을 끊는 자 일인이라. 그러하니 오늘날 다른 공부와 사업을 다할 생각하지 말고 다만 '저 원수 하나 없이 할 공부'만 하옵시다. 우리의 원수를 없이 할 공부는 다른 것 아니요. 곧 '무학(武學)'이요, '무기(武技)'요, '무육(武育)'이라. '무학' '무기' '무육'은 급히 힘쓸 것이요 또한 먼저 힘쓸 것이라.'무기(武技)'가 아니면 강토를 회복할 수 없고 '무기'가 아니면 생업을 임의로 할 수 없고 '무기'가 아니면 자유로 지낼 수 없고 '武技'가 아니면 이 세상에 살 수 없소이다. (하략)" 망해가는 나라를 눈뜨고 볼 수만 없어 무력항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한인들이 가 있는 곳마다 들불처럼 타올랐다. 무엇 보다 단위부대를 통솔할 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가 각지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미국 와이오밍의 탄광에서는 광부들이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끌고 목총을 잡았다. 노예노동이나 다름없는 간고한 환경인 멕시코에서도 그리고 한인들이 대거 이주한 만주의 서간도에서도 당장 기약은 없지만 서둘러 무관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무관학교들 중 가장 먼저 세워진 학교가 바로 박용만이 주도해 세운 '소년병학교'였다. '저 원수 하나 없이 할 공부만 하옵시다'라고 주장한 박처후는 박용만 못지 않게 '소년병학교'와 운명을 같이 한 사람이다.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회의에서 하기군사훈련을 실시한다는 안을 제출해 의결을 이끌어낸 사람도 박처후였다. 1912년 박용만 교장이 하와이로 떠나자 그 후임 교장이 됐다. 일본 영사관의 압력으로 '소년병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그는 두 해를 더 버텼다. '소년병학교'의 첫 졸업생이었던 그는 동시에 교관으로서 훈련생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다.
하와이에 노동이민을 온 건 그의 나이 24세였던 1905년. 일 년쯤 머물다 박용만이 있는 커니 시로 이주했다. 보석상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수학과 영어를 공부했다.
1913년 6월 4일 미국에서 최초로 한국유학생회가 조직됐다. 소년병학교 출신들이 주동이 된 것이다. 시카고 대학, 노스웨스턴 대학, 네브래스카 대학과 오마하와 링컨 시 소재 고등학교 한인 학생들이 헤이스팅스 시로 모였다. 그들은 회장으로 박처후를 선출하고 1년에 두 번씩 영문잡지를 발행하기로 결의했다.
박처후는 1915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을 졸업했다. 소년병학교 교장을 맡은 외에도 네브래스카 거류민회 총회장을 지냈다. 1916년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웰치의 통역 겸 조수로 귀국한 박처후는 연희전문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망명의 길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무장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미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세 갈래의 노선이 있었다. 대략 안창호는 교육, 이승만은 외교, 박용만은 무력을 통해 목표를 달성코자 했다. 물론 세 노선 다 나름의 당위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군사력을 기르는 길 밖에 없다는 박용만의 확신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먼저 그런 발상을 한 사람은 박용만만이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각처의 한인들이 다투어 무관학교를 세운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박용만의 주도로 1909년 6월 처음 군사훈련에 들어간 '소년병학교'는 해외에 설립된 최초의 무관학교였다. 다음 해 2월에는 멕시코의 메리다 지방에 '숭무학교'가 설립됐다.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에 의해 만주에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건 1911년이었다.
1914년 6월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했다. 같은 해 북간도에서 이동휘가 '대전학교'를 설립했다. 1920년 2월 캘리포니아 주 윌로우스에는 김종림과 노백린 장군에 의해 '한인비행학교'가 창설됐다. 군용 비행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