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 까마귀떼, 이놈들아 나 아직 안 죽었어

[우리나라 바닷가 1만리 자전거여행 49] 거제도 여차몽돌해수욕장에서 칠천도 앞까지

등록 2010.12.09 21:23수정 2010.12.09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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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월)


간밤에 오늘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그리고 산간지방에는 눈이 온다고도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거제도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그 대신 바람이 심하게 분다. 그것도 맞바람이다. 일단 비가 오는 데다 바람까지 부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하지만 비가 오는 대신에 바람이 부는 게, 비가 내리는 것보다 더 낫지는 않다. 몸이 무거운 상태에서는 차라리 바람이 부는 것보다는 비가 내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오늘 아침 일기예보에 내일까지 찬바람이 분다고 했으니 미리 각오를 하는 게 좋겠다.

벌써 며칠째 기사를 쓰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포기를 했다고 봐야 한다. 매일 저녁 여행을 마치고 나면, 피곤이 엄습한다. 몸을 씻는 것조차 귀찮은 마당에, 방바닥에 주저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건 이제 생각조차 하기 싫다. 컴퓨터에 전원을 꽂아 몇 번 글쓰기를 시도해 봤지만, 더 이상의 진도는 나가지 못했다. 그저 전원을 켜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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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가 보이는 바람의 언덕. 왼쪽 언덕 아래는 도장포. ⓒ 성낙선


나는 과연 '완주'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해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날 있었던 일은 가능한 한 그날 저녁에 정리해서 올리겠다는 약속은 더 이상 지키지 못하게 됐다. 사진을 카메라에서 컴퓨터로 옮겨 담는 단순한 일조차 미룰 때가 있으니 두말 해 무엇하랴.

이번 여행에서 주요한 목적 중에 하나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그날의 바닷가 풍경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거였다. 독자들이 내 글과 사진을 보는 그 순간만큼은 실제 바닷가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 그걸 해내지 못하게 돼서 대단히 미안하고 섭섭하다.


이제 남은 건 애초 목적했던 대로, 이 여행을 끝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물론, 완주가 쉬운 일은 아니다. 앞으로 또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지금은 당장 거제도가 최대의 걸림돌이다. 거제도가 나를 몹시 힘들게 만들고 있다.

어제는 남쪽 해안을 돌면서 거의 녹다운 상태로 여행을 마쳤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거제도의 동쪽과 북쪽 해안을 돌아야 하는데, 이 지역은 내가 이미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적이 있는 곳이다. 완주는 과연 내가 처음 목적했던 대로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인지, 지금은 사실 모든 게 다 불투명하다.


어제 무리를 한 탓인지 오늘 아침엔 다리가 몹시 아프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그땐 정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다. 펜션을 나서자 바로 오르막이다. 무릎 관절에 채 '윤활유'가 돌기도 전이다. 2차선 도로가 산 속을 헤집고 올라간다. 여차재라는 이름의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다. 고개 위로 찬바람이 휘몰아친다.

기가 막힌 건지 숨이 막힌 건지, 이제는 더 이상 내 입에서 아무런 말도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 와중에 숲 속 어디에선가 계속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때가 때인 만큼 그놈들이 나무 꼭대기에 앉아 나를 주의 깊게 내려다보고 있는 걸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거제도는 제주도만큼이나 까마귀가 많은 곳이다. 가는 곳마다 머리 위에서 깍깍 울어대는 까마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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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덕. ⓒ 성낙선


사실은 거제도 전체가 '바람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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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언덕으로 내려가는 길, 동백나무 숲. ⓒ 성낙선

바람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세다. 산 속 도로를 내려와 다대항을 지날 무렵, 바다에서 불어온 회오리바람이 도로를 휩쓸고 지나간다. 몸이 휘청거리는 바람에 자전거 위에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길가 담벼락에 기대서서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다대항을 떠나 다시 '바람의 언덕'까지 천천히 언덕을 오른다. '바람의 언덕'은 거제해금강을 가는 좁은 길목에서 왼쪽으로 바다를 향해 돌진하는 듯이 툭 튀어나온 바위 언덕을 말한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바람'과 '언덕'이라는 단어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고 있다. 적나라하다. '바람'과 '언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람의 언덕은 사실 누렇게 변색한 풀밭 외에 달리 봐줄 것이 없는 황폐한 언덕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 이 먼 곳까지 찾아오는 이유는 아마도 '바람'이 되고 싶었던, 그래서 그 바람처럼 푸른 하늘을 날고 싶었던 소망을 충족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바람'이 바닷가 바위 '언덕' 위로 거세게 불어닥친다. 언덕 위에 서 있으면 내 몸이 광대한 바다 위에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바닷가 높은 바위 언덕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왜 이곳을 바람의 언덕이라고 부르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게 바람의 언덕은 동경의 대상이다. 꼭 한 번 찾아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오늘 내게 바람의 언덕은 사뭇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바람'과 '언덕'이 함께 따라다니게 되면, 최악은 아니더라도 차악은 되는 악조건이 형성된다. 바람의 언덕에서 마주친 '바람'과 '언덕'이 오늘 내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예고하고 있다.

바람이 부는 날, 바람의 언덕을 넘어가는 바람 소리가 마치 내게 '오늘 네가 가야 할 길이 이곳에 있다'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오늘 내게는 바람과 언덕은 물론이고, 바람의 언덕 또한 '역경'과 '고난'을 이야기하는 단어들일 뿐이다. 바람의 언덕을 떠나면서, 나는 사실은 거제도라는 섬 전체가 바람의 언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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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라해수욕장 ⓒ 성낙선


고양이 사체를 쪼아대고 있는 까마귀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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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몽돌해수욕장 ⓒ 성낙선

거제도는 바람만큼이나 몽돌이 많은 곳이다. 바닷가 대부분의 해수욕장들이 몽돌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지나온 여차몽돌해수욕장이 그렇고, 바람의 언덕에서 내려와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해수욕장인 학동몽돌해수욕장 역시 몽돌밭이다. 몽돌밭이 사진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넓다.

바람과 몽돌 역시, 바람과 언덕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도 제 자리를 떠나지 않는 몽돌이 왠지 믿음직스럽다. 그래서 그런지 몽돌밭 위에서는 바람마저도 잔잔한 느낌이다. 해안에 몽돌밭이 어찌나 많은지 거제도를 대표하는 상징물 역시 몽돌이다.

학동몽돌해수욕장을 떠난 뒤로도 계속 언덕이다. 바람 또한 그칠 줄 모르고 불어오고 있다. 바람이 매우 차다. 온몸의 감각이 점차 둔해지고 있다. 이제는 별 생각 없이, 거의 기계적으로 페달을 밟고 있다. 그러다 구조라해수욕장으로 들어서는 길 입구에서 '끔찍할 수도 있었을' 광경을 목격한다.

까마귀들이 도로 위에 피를 흘린 채 널브러져 있는 고양이 사체를 부리로 쪼아대고 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 장면이다. 그런데도 오늘은 별 다른 느낌을 받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내 마음이 '자연'스럽게 자연을 닮아가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자연만큼이나 '잔인'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장승포를 지나면서, 거제도에 들어서 처음으로 자전거도로가 나타난다. 반가운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조금 허탈하다. 이 자전거도로는 그냥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인도도 아니고 갓길도 아닌 길을 차도와 분리해서는 그 위에 살짝 자전거도로 표지판을 세워 놓았다.

장승포를 지나면 바로 옥포조선소다. 옥포조선소 근처에는 조선소로 출퇴근하는 차들과 오토바이들이 발에 거치적거릴 만큼 많다. 그러니까 이곳의 자전거도로들은 그 차들과 오토바이를 피해 자전거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것마저도 조선소를 벗어나면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의 도로들은 그만큼 거칠고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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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포항에서 시작되는 자전거도로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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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조선소 앞 도로. 갓길을 점령한 자동차들 ⓒ 성낙선


'조심히 가라'는 말에 눈물이 나올 뻔하다

흥남해수욕장을 지나는 사이, 어느새 해가 크게 기울기 시작한다. 오늘 저녁은 장목면의 면소재지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그러려면 앞으로 20~30km 가량을 더 가야 하는데, 내가 과연 해가 지기 전에 그곳에 당도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남은 힘을 다해 페달을 밟는다. 하지만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는다. 이미 체력이 바닥이 나 있는 상태다. 언덕을 거의 걷는 것과 같은 속도로 올라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가거대교 공사장 부근의 한 언덕에서 여러 명의 행인과 마주친다. 노무자들로 보이는 남자들 여러 명이 언덕 위에서 내려오더니, 도로 건너편에서 내게 말을 붙인다. 이럴 땐 말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그 양반들이 그걸 알 까닭이 없다. '어디까지 가냐?' '어디에서 왔냐?' '혼자냐?'고 따발총처럼 쏘아대는데 숨이 컥컥 막힌다. '강원도 고성' '서울'… 하고 최대한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랬더니 그들 중에 서울에서 온 사람이 또 묻는다, '서울 어디냐?'고. '길음동'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보문동에 산다'며 같은 성북구라고 무척이나 반가워한다. 이때쯤 나는 그게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 남자는 수개월 집을 떠나 이 낯선 곳 험한 공사장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얼마나 집이 그리웠으면, 같은 '구'에 산다는 말만 듣고도 고향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을까? 내가 무뚝뚝한 반응을 보여서 꽤 뻘쭘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머리 위로 두 팔을 흔들며 소리친다. '조심히 가라'고. 순간 그 말에 어찌나 가슴이 뭉클해지던지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제길 그게 다 이놈의 언덕 때문이다.

장목면 면소재지에는 근처도 가지 못했는데 해가 지고 있다. 거제도 최북단에 있는 구영해수욕장 근처, 이름도 알 수 없는 작은 포구 앞이다. 계속해서 가다가는 도중에 해가 떨어질 게 분명하다. 할 수 없이 포구 앞에서 민박을 찾는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민박조차 모두 만원이다. 가거대교를 잇는 도로 건설 공사 때문에 주변의 숙박업소들을 모두 공사장 노무자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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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와 부산을 잇는 도로. 오는 12월 중순 개통 예정.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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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거제를 연결하는 거가대교. 자전거여행자에겐 그림의 떡. ⓒ 성낙선


언덕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선 '벽'처럼 보인다

낭패다. 바람은 거세게 불고, 해가 기울면서 기온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잘 곳이 없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한탄해 봐야 소용이 없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면소재지가 있는 곳까지 달려간다. 가능한 한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정신없이 페달을 밟는다. 하지만 면소재지에 도착해서도 숙소를 찾지 못한다. 이미 거리에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뒤다. 막막하다.

한참을 헤맨 뒤에 거리의 한 상점에서 이곳엔 여관은 물론이고 민박도 없다는 답변을 듣는다. 그리고 어딘가에 여인숙이 한 곳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곳은 차마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여인숙과 관련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날 밤, 다시 밤길을 더듬어 실전리라는 마을까지 달려간다. 그 마을에 모텔이 하나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다.

실전리는 칠천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차라리 잘 됐다 싶다. 내일 아침 일찍이 칠천도를 들어갔다 나오면,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거제도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전리까지 밤길을 달리는데 어디선가 또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그 순간 머리 속으로 구조라해수욕장 근처에서 고양이 사체를 쪼아대고 있던 까마귀떼가 떠오른다. 섬뜩하다. 환청일지도 모르지만, 이놈들이 하루 종일 내 머리 위를 뱅뱅 돌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어두운 밤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에 우려를 나타낸 분들이 계시다. 시골길은 특히 더욱 더 위험하다면서 자전거를 타지 말라는 경고를 여러 차례 받았다. 나도 밤이 무섭다. 특히 까마귀 울고, 자동차 우글대는 밤길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데나 멈춰 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밤길 여행을 감행하는데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을 해야 할 정도로 오늘은 종일 뭔가에 쫓기듯이 다급했던 하루다. 그리고 언덕이 얼마나 힘에 부치던지, 오늘 드디어 길이 길로 보이지 않고, 내 앞에 벌떡 일어서 있는 벽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여행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점점 더 견디기 힘든 상황을 맞고 있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85km, 총누적거리는 3688km다.

덧붙이는 글 | * 11월 6일 이후로 여행 중에는 기사를 쓰지 못했다. 11월 6일 이 후 11월 30일까지 오마이뉴스에 게재한 기사는 11월 6일 이전에 작성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12월 1일 이후에 게재하고 있는 기사는 11월 23일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서울에서 작성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11월 6일 이후로 여행 중에는 기사를 쓰지 못했다. 11월 6일 이 후 11월 30일까지 오마이뉴스에 게재한 기사는 11월 6일 이전에 작성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12월 1일 이후에 게재하고 있는 기사는 11월 23일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서울에서 작성한 것이다.
#바람의 언덕 #학동몽돌해수욕장 #구조라해수욕장 #거가대교 #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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