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착하게 사는 게 너무 괴로워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자기 결대로 사는 조르바에게 배운다

등록 2010.12.07 14:51수정 2010.12.07 14:51
0
원고료로 응원
책을 읽고 난 후 단 한 줄이라도 독후감을 적어보자는 결심을 했던 게 작년이었다. 명사들의 권고(?)를 실천해 보자는 소박한 결단이었는데, 흐트러진 일상 속에서 중심을 잡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독후감을 뒤적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쓴 내용을 다시 훑고는, 문득 창훈(가명)이가 떠올랐다. 

'심장을 기어이 비집고 올라와 핏물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뻐 좋아 날뛰면서도 인간의 무력함이 신물 나고 가련하여 헛헛하게 웃어댄 적이 있기나 했었는지 좀처럼 되살려낼 수 없다. 그저 작은 일상에 취해 우물거리고 히죽이면서도, 차오르는 공허함은 채 한 줌도 되지 않았다. 제대로 살지 않은 까닭이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완벽한 평화, 온전한 자유, 깨질 것 같지 않은 단호한 이성... 삶은 날카로웠지만, 나는 잠잠했다. 

그런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로 단숨에 뻣뻣해진 내 목줄을 따버렸다. 심장이 헐떡이고, 퀭한 눈 속에 눈물이 차오르고, 송곳 같은 통증이 혈맥을 관류하면서 온 몸이 스멀스멀 아파온다. 인간은 결코 관념적이고 피상적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한계 그 너머를 갈망하며 성큼 성큼 걸어 나가 버리는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것, 더러움과 오물 속에서도 꽃을 찾고 성스러운 것을 발견해 내고 싶어 안달하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결국은 굴레 속에서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도 많고 납득할 수 없는 것도 많은 세상이지만, '사는 것'말고는 그 어떤 저항도, 반항도 허락되지 않은 존재라는 것...돌아보면 아픔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실존 인물 조르바는 <생의 한 가운데>의 니나 부슈만을 닮았다. 날것으로의 생을 가공하지 않고 두려움을 참아가며 벌컥 벌컥 들이킨다. 힐난도, 훈계도, 질책도, 야유도 그에겐 소용없다. 틈만 나면 하나님이 없다고 소리치지만, 조르바야말로 가장 하나님께 가까이 간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분명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고 키스하라고 손을 내밀자, 사내는 이봐요, 영감, 비켜 줘야 가든지 말든지 하지! 소리쳤을 거라는 대목에서, 조르바의 표현 때문에 한참을 웃었었다. 인본주의의 본향, 그리스에서라면 하나님을 이런 방식으로 상상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국 그리스를 위하여 터키인들을 죽이고 나서야, 인간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에 염증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조르바, 늙고 병든 오르탕스 부인을 때로는 희롱했으면서도 가장 애처로이 사랑하고 존중했던 한 사내, 금식과 금욕에 지친 수도승에게 악마에게서 벗어나려면 파라핀을 들고 수도원에 불을 지르는 게 구원이라고 일갈했던 인간, 신성한 야만이란 게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준 구도자... 조르바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활자는 그가 켜는 산투르가 되고, 그의 춤사위가 되는 듯했다. 

조르바가 버찌를 잔뜩 먹어 버찌를 이겨 냈듯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책을 쓰고 읽으면서 책을 극복했듯이 나는 이제 불평을 멈추고, 덴덕스럽고 물컹이는 삶의 편린들을 잘근잘근 씹어 삼킬 참이다. 내게 주어진 삶대로 사는 것, 부활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확신을 얻었으므로'

창훈(가명)이는 '착하게 사는 게 괴롭다'며 고민을 털어놨었다. 머리나 배가 자주 아파서,  그저 학업 스트레스려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요지는 선생님이나 부모님께서는 내내 '착하게 살아라, 다른 사람부터 챙겨라,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행동해라' 하시는데, 막상 그렇게 살려고 하니, 너무 힘들다는 거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상대방은 자신을 살갑게 대하지 않으니 속상하고, 그렇다고 착하게 살라는 말씀을 어기자니 양심이 괴롭다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할지 몰라 난감했다.

대학 시절 정신과 실습 시간, 환자 중에 자라는 동안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가정 환경을 가진 분이 많아 놀랐다. 실습 내내 스스로 자신의 불완전성을 각인하고 용납하기 전에, 자신의 결대로 살면 된다는 진실을 습득하기 전에, 완벽, 성결, 명예를 먼저 가르치고 강조하는 것이, 어떻게 불행한 결과로 이어지는지 목도했다.


그런데도 도덕적인 훈계를 강조하는 기계적 습성에 닳고 닳아, 가끔 이 사실을 깜빡 잊어버린다. 아이들에게 인간은 결코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면서, 결대로 살도록 격려하는 대신, 완벽한 모습을 갖춰야한다고 주입하는 게 특기가 되어버린 것. 가슴 한구석이 아리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3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4. 4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5. 5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