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 제가 받아도 되나 모르겠습니다"

[2011년 2월 22일상②] 박호열, 변창기, 김학용, 이충섭, 이희동

등록 2010.12.30 18:09수정 2010.12.30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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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2011 2월22일상' 수상자로 고상만 김학용 박석철 박호열 변창기 신은희 안호덕 이충섭 이희동 하성태 총 10명의 시민기자를 선정했습니다. '2월22일상'은 한 해 동안 꾸준히 좋은 기사를 쓴 시민기자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시상식은 2011년 2월 22일 <오마이뉴스> 상암동 사무실에서 치러집니다. '2011 2월22일상'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상금 50만원을 드립니다. 이 자리에서는 '2010 올해의 뉴스게릴라상'과 '2010 특별상', 시민기자 명예의 전당(명예의숲) 시상식도 함께 열립니다. 수상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인사 드립니다. <편집자말>

"영화평 쓰고 감독한테 고맙단 이메일도 받았죠"
[2011년 2월 22일상] 영화로 시대를 말하는 박호열 기자

박호열 시민기자 ⓒ 박호열

그는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는 일은 절대 싫증이 나지 않을 거라는 듯. 어릴 적부터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그는 영화를 통해 세상 이야기를 비춰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80년에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감방'에 드나들기도 했던 그, 이제 49세의 중년이 됐다. 그리고 과거에는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고 있다.

영화를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 박 기자의 영화평은 정치 기사와도 같다.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까닭이다. '성미산 지키기'부터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도발'과 같은 굵직한 일들까지 영화를 통해 현 정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 아줌마, 성미산 마을에 보내고 싶네)

"FTA 재협상을 앞두고 선택한 영화 <보더타운>은 멕시코 여성노동자들이 겪던 실상이 70~80년대 우리 누이들이 농촌에서 달동네 공단으로 스며들었던 때가 떠올라서 더 각별하다"고 말하는 그. 영화 '살인의 강'을 보고 쓴 기사 <3명의 죽음, 오래 전에 본 듯한 피해자들>은 영화평이 감독 마음에 들어 메일까지 받았다. 반면, 이명박 정부 비판 칼럼엔 좌파 빨갱이란 메일과 함께 전화를 걸어 욕을 하는 독자도 있었다.


"지금까지 평균 1주일에 한 편씩 영화를 썼는데, 이제는 영화 소재가 슬슬 밑천이 드러나요. 상까지 받은 마당에 기사 안 쓰면, 입 싹 씻은 놈으로 오해받지 싶기도 해서 더 써야겠죠?"

혹 기회가 닿는다면 독립영화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는 그는 앞으로도 계속 영화 관련 기사를 쓰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천태만상의 무늬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예술입니다. 그런 만큼 생활인들의 건전한 상식이 관통하는 사회가 되는데 일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제가 굳이 영화관련 기사를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니까요."

"취재요청에 머리에 쥐 날 뻔했어요"
[2011년 2월 22일상] 이 땅의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변창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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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창기 시민기자 ⓒ 변창기

150여일이 지났다. '현대 차 불법 파견' 판정이 난 후 대책 없는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위해 추운 날씨 속에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변창기 기자가 '원청과 하청'이란 다른 이름이 만들어 놓은 현실을 말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 2월부터다. 47세의 그는 현대 자동차 하청업체에서 10년 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했고 지난 3월 정리해고를 당했다. 

정규직과 다른 비정규직을 더욱 더 열악한 상황으로 내몬 것은 지난 3월이다. 10년 동안 일해 온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하며 쓴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저 잘렸습니다>란 글에는 한 가정의 가장이 부딪히는 암담한 현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 후 감귤농사를 해보겠다며 제주도로 내려갔지만 여의치 않았고 다시 귀향하여 일하게 된 고물상에서의 하루를 기록하기도 했다. 힘든 일상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부당 해고 된 비정규직의 복직을 위한 시위다. 그렇게 그는 자신과 비정규직으로 일해온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고 있다.

미포조선 비정규직의 시위를 돕다 징계를 받은 정규직 김석진씨의 취재 요청으로 쓴 기사  <살면서 이렇게 억울한 일은 처음이에요>가 제일 어려웠단다. "미포조선과 현대중공업에 얽힌 사실 확인을 해야 했다, 특히 민노총 관계자 인터뷰를 하는 과정은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털어 놓는다.

피자집, 은행, 공장 일상의 어디에도 비정규직이란 이름이 존재한다. 변창기 기자는 이 땅에서 비정규직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목소리가 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제가 이런 뜻 깊은 상을 받아도 되나 모르겠습니다. 잘 해서 주는 상 보다는 잘 하라고 주는 상으로 여기고 앞으로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여 더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시간만 나면 여러 방면으로 체험도 해보고 그 내용을 올려 보는 게 소망입니다."

"항의성 쪽지에 몸살을 앓을 정도였죠"
[2011년 2월 22일상] 엄지게릴라입니다, 김학용 기자

김학용 시민기자 ⓒ 김학용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맺은 후 기사 쓰는 즐거움보다 엄지뉴스에 사진 올리는 것이 더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김학용 기자는 자신을 엄지게릴라로 불러달란다. 생활 속의 재미있는 순간을 실시간 포착하기 위해 차와 사무실에 각각의 카메라를 비상 대기시켜 놓을 정도다. 덕분에 지난 1월 <목욕탕에 CCTV이래도 되나요?>로 시작해 <35년 전 사시합격자 명단에서 눈에 띄는 노무현>등 현재까지 단골 엄지짱으로 주목받고 있다.

김 기자는 블로그에 일상의 이야기를 올리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시민기자의 권유로 2009년 12월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다.

오마이뉴스뿐 아니라 여러 포털에서도 주요 뉴스로 다뤄져 수백 만의 조회 수를 기록한 기사 <내 이름은 '곽쿵', 잊지 못할 이름이죠>와 후속기사로 쓴 <'17자, 22자 남매'>에 등장하는 '박하늘별님구름햇님보다사랑스러우리'씨와의 국제전화인터뷰로 절망적인 전화요금고지서를 받은 적도 있단다. <현금영수증 끊으려면 물건값 10% 더내라?'>는 기사로는 며칠 동안 자영업자들의 항의성 쪽지를 받는 바람에 몸살을 앓을 정도였다고 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를 조금 더 재밌게 풀어나가려고 노력한다는 그는 오늘도 기사쓰는 재미에 푹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게 바빠진 자신을 돌아볼 때 가장 행복하단다.  앞으로 구전가요, 민중가요, 번안가요 등의 숨은 이야기와 비화 등을 발굴하고 또 생활 속의 환경문제를 다룬 기사를 쓰고 싶다고.

"이제 1년 남짓 활동했는데 이 상을 제가 받을 수 있는 자격이나 되는지 모르겠네요. 기사보다는 엄지뉴스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상을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팡팡' 터지는 기사 기대해주세요."

"쨉쨉 원투로 착실하고 꾸준하게"
[2011년 2월 22일상] 회사원 복서 이충섭 기자

이충섭 시민기자 ⓒ 이충섭

거친 목소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나의 작은 달팽이관에 닿은 목소리는 앳된 청년의 그것이다. "기사를 송고할 때마다 채택되지 않을까 손이 많이 떨렸다"고 하는 그는 회사원이면서 41살의 복싱 선수다.

"1대1로 맞서야만 하는 링에 오르기 위해서는 항상 겸손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준비해야만 합니다. 사람의 체력과 정신력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쉽게 초라해질 수 있는지를 함께 느끼게 해줍니다. 폭력이 오가는 운동이 사람을 철학적으로 만들어 준다는 게 신기하죠."

회사원으로 살던 30살 어느 날 또 다른 도전을 하기 위해 링 위에 오른 그. 40살이 되던 해 오른 아마추어 복싱대회 참가했던 내용을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써, 방송진출의 기회를 가졌다.

<이매리 만난 60억분의 1의 사나이 표도르>가 실린 <오마이뉴스> 주간지를 보고 직접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표도르를 이야기 하며 "<오마이뉴스>가 러시아까지 전달되었다니 신기했다"는 그는 "최요삼 선수 장례식장에서 눈물이 나 사진을 찍지 못하고 돌아 온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한다.

비주류인 복싱기사가 매체에 실린다는 것만으로도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는 그때부터 꾸준히 '한국 복싱 살리기 릴레이 인터뷰'를 이어간다. "한국챔피언이 되고서도 생전 처음으로 기사에 실렸다며 가족,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액자에 넣어 체육관에 걸어놓는 무명의 복싱선수들이 고맙다는 말을 전해 올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선반기계공 프로복서, 링 위에서 쓰러지다...)

"글이 실리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기만 했고 수상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복싱을 수련해왔듯 꾸준히 해온 일이 쌓여서 이뤄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KO 한방을 노리기보다는 잽잽원투로 착실하고 꾸준하게 잘 알려지지 않은 비주류 종목 선수들에 대한 인간적인 기사를 쓰겠습니다."  

"언젠가 세계일주 기록을 남기고 싶어요"
[2011년 2월 22일상] 총각에서 아빠가 된 이희동 기자

이희동 시민기자 ⓒ 이희동


보편적인 일상을 살지만 뭔가에 대한 추구가 빠져있는 삶이 있다. 허나 그는 달랐다.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고 싶다는 이희동 기자는 "오마이뉴스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서 잡고 있는 유일한 끈"이라고 말한다.

영화평과 여행기를 주로 쓰던 그가 결혼과 함께 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땅에서 가장으로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32살엔 '2009년 대한민국에서 결혼하기'를 연재했고, 33살엔 '좌충우돌 초보아빠의 육아일기'를 연재했던 그. 대한민국에 사는 남자들이 겪는 행불행을 시간 순으로 전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빠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적어진다는 다른 말이기도 한 것이다.

출산 후 집에서 아내의 몸조리를 돕다 신종플루에 걸린 덕분에(?) 때 아닌 동해로의 나 홀로 휴가를 떠나기도 했던 그는 이제 얼마 있으며 두 아이의 아빠가 된다. <"전셋값 올려주세요, 1천만원"...올 것이 왔다>로 전셋값에 대한 서민들의 애환을 관통하고, 연극 극본을 쓰는 아내의 연극 평 또한 빠뜨리지 않으며 외조를 하고 있다.

함께 근무하던 비정규직 여성이 정리해고 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쓴 <비겁한 정규직'이 '힘없는 비정규직'을 떠나보내며>가 포털사이트에 오르기도 했다. 회사 과장님의 "그 이희동이 너 아니냐"는 한마디에 뜨끔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다. 그 일을 계기로 그 여직원과는 아직도 가끔 연락을 주고 받는단다.

"바쁜 업무로 늦은 퇴근을 하고 주말도 격주로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이 부족한 게 안타깝다"는 그는 세계일주의 꿈을 키우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을 꼭 여행기로 남기고 싶다고.

"처음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조금 놀랐습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더 열심히 써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에는 부당한 일을 당했다며 기사 써 주기를 요청하는 분들도 가끔 있는데, 그들에 대한 책임감도 더 생깁니다."
#박호열 #이희동 #이충섭 #변창기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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