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무능한 언더그라운드 선생님.... 교원평가를 극복하는 이상한 생존법

등록 2010.12.30 13:16수정 2010.12.3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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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는 학교 현장에선 유능한 선생님이 되어야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교원평가는 무능하고 자격 미달 교사를 퇴출하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자기 연찬을 통해 배우기를 멈추지 않고 전문성을 향상하는 선생님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선생님이다.

하지만 나는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너무 무능해서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너무 무능해서 아무도 일을 맡기지 않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너무 무능해서 아이들이 우습게 여기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첫째, 무능한 선생님은 석박사 학위가 없으면 좋겠다. 석박사 학위가 없으면 일단 아는 게 적다고 인정받는다. 그래서 항상 공부해도 무능한 사람이다. 아이들도 학위가 없으면 만만하게 본다. 그래서 편하게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물론 훌륭하신 석박사분들은 정말 공부를 많이 하셨는데도 아이들은 편하게 생각한다.) 만만해서 학생들이 편하게 대하고, 승진은 당연히 못할 거니까 승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고 아이들과 같이 고민하고 아이들과 같이 아파할 수 있다. 아이들과 떨어지지 않는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둘째로, 기획 및 행사에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학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말고도 더 많은 일을 하는 곳이다. 교육청에서 매일 쏟아지는 각종 보고공문을 처리하고, 각종 기록을 정리하고, 해마다 바뀌는 입시 정책을 숙지하고, 부적응 학생 생활지도하고, 학부모 소환하고, 야간 자율 학습에 참여하도록 강제하고, 야간 자율 학습 도망간 친구들과 강제로 상담한다. 유능한 사람은 일이 더 많다. 각종 업무를 잘 하면, 믿을 만하니까 일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유능한 사람일수록 보고 공문 때문에 수업에 소홀해 지는 경우가 더 많다.

나는 무능해서 또 일을 맡기면 불안해서 일을 많이 안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수업 준비도 더 하고, 아이들과 더 긴 시간 자유롭게 상담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아이들이 "선생님 바빠요?"라고 물어보면, "샘은 항상 한가해. 뭐 도와줄 일 있어?"라고 말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셋째로, 쇼에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언젠가 장학지도가 나왔을 때 수업연구를 한 적이 있다. 수업연구의 주제는 쇼가 아닌, 평상시 큰 노력 없이 쉽게 준비할 수 있는 영어 작문 수업이었다. 한 시간의 수업을 통해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보여주기식 수업연구가 아니라 평상시 진도 나가던 대로 했던 수업이었다.

참관자들과 수업 후 의견을 나눌 때, 장학사 한 분이 내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쇼가 필요한 거예요." 나는 쇼를 못해서 장학사분들이 나를 모르면 좋겠다. 교육청에서 하는 여러 행사에 불려가지 않는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한 자리에 진득이 앉아서 하던 일 계속 하는 무능한 교사가 되고 싶다.   


넷째로, 난 입시지도를 못하는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고3 같이 중대한 시기의 담임은 절대 주지 않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대도시의 입시 명문 고등학교에서 거들떠보지 않는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그 답답하고 숨 막히는 곳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학생들과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상담하고, 대학 가는데 필요 없는 인문학 동아리도 열심히 하고, 시험에 나오지 않는 쓸모없는 것들도 열심히 가르치는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나는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처럼 돈도 안 되는 음악에 미쳐 제멋대로 열심히 사는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겨우 겨우 학교에서 살아남아도 아이들 옆에서 여전히 인간을 가르치고, 사회를 가르치며, 서로 어울려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무능한 선생님이 되고 싶다. 장자의 인간세에 나오는 쓸모없는 나무와 같이 학교에 오래도록 남아서 평교사로 정년퇴직하는 것이 내 꿈이다. 그래서 무능한 언더그라운드 선생님의 좌우명은 이것이다.

"綿綿若存 用之不勤(가는 실처럼 이어지고 또 이어져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아니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겨레 블로그와 교육희망에도 송고하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한겨레 블로그와 교육희망에도 송고하였습니다.
#교원평가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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