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71년에 처음 이곳에 와서 터를 잡았으니까 올해가 꼭 40년이 되네요. 그때만 해도 여기는 전부 황토밭과 논밖에 없었지요. 4평(약 13㎡)으로 시작해서 지금의 40평(약 130㎡)이 되기까지 어려운 시절도 참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직하게 거래를 해왔던 것이 이만큼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같아요. 친구들은 모두 실업자지만 저는 아직도 사장님 소리 들으면서 건강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이보다 좋은 직업이 또 어디 있겠어요(웃음)."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진흥종합시장에서 '신일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40년째 잡화와 부식품을 도매하고 있는 신원범(76)씨는 정직이 최고의 장수비결이었다면서 "뭐 하나 더 쥐려고 하는 것보다 더 주려고 하다 보면 결국 그것이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1월 5일 오후 2시 신씨의 가게를 찾아 그가 살아온 인생역정을 들어보았다.
4평이 40평으로, 한푼 두푼 모으는 재미 쏠쏠
신원범씨는 충남 부여 출신으로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를 나왔다. 그 시절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고등교육까지 다녔다는 것이 대단한 일처럼 보였다. 물론 사정이 여의치 않아 졸업을 하진 못했지만, 이 이력을 배경으로 그는 가정교사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돈벌이가 제대로 되지 않아 결국 경제적 이유로 해군 하사관으로 입대한다.
군 제대 후 1962년에 부평에 온 신씨는 사촌누나를 따라 미군부대 쓰레기를 실어 나르는 일을 하면서 사회에 대한 시각을 넓혀갔고, 이후 행상 일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가게를 시작해 영업부터 총괄판매까지 아내 안영자(73)씨와 함께 하나하나 개척해 나간다.
"(금고를 가리키며) 저 금고 외벽에 보면 글씨가 보이죠. '1971년 11월 10일 개장하다' 일부러 저렇게 써놓고 첫 사업의 의미를 되새기곤 했죠. 방세를 모두 빼서 시작한 첫 장사가 양은그릇 장사였어요. 다행히 지인께서 리어카 2대 분량의 물건을 공급해 주는 바람에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죠. 당시 공장 노동자들이 많았던 때라 그런대로 수입이 괜찮았어요."
그렇게 첫 사업을 시작한 신씨는 부평진흥시장의 첫 '상회'를 연 개척자로 소문이 나면서 손님들도 점차 늘기 시작했고, 이후 양은그릇 단일품목에서 지금의 잡화물 판매로 업종을 변경해, 4평의 좁은 가게도 40평으로 확대해서 기반을 다진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 시장 앞쪽에 농수산물도매시장이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부식물 판매가 수입이 괜찮았다. 도매와 소매를 함께한 덕분에 값싸고 질 좋은 품목들이 입소문을 타면서 한때는 종업원도 4명까지 두는 등 사업하는 재미가 쏠쏠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가게도 몇 집 없어서 하루 매상이 5000원에서 8000원까지 했고, 최고 많이 팔 때는 월 700만~800만 원만 정도 됐으니 당시 시세로 참 팔자 피고 살았지요.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이더라고요. 여러 경쟁가게도 생기고, 대형마트까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고 나니까 어느새부턴가 이곳의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죠. 지금도 다들 가게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시장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점점 창고처럼 변해갔지요. 지금은 그저 근근이 연명하고 있는 수준이랍니다."
신씨네 가게는 시장에서도 좁은 골목길을 한참 들어와야 찾을 수 있다. 지리적 위치도 좋지 않다 보니 사람들이 오고 싶어도 찾기가 힘들어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이 가게를 포기할 수 없단다. 이미 40년 동안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오후 7시에 끝나는 일상이 몸에 배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집에서 쉬고 있으면 몸이 아픈데 건강도 챙기고 일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일이 취미로 변해 버린 셈이다.
행복의 파랑새는 늘 우리 곁에 있어
신씨는 젊었을 때처럼 악착같이 일하지는 않는다. 이제 그의 곁에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든든한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 신용준(42)씨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요량으로 대를 이어 장사수완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배달도 하고 거래처도 확보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 위해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신원범씨는 진흥종합시장상인회 대표도 3년 동안 하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상가의 번영을 위해 노력했다. 한번은 대형화재가 나서 이웃집 가게 물건이 몽땅 타버렸는데, 관리비를 경감해 주면서 재건을 위해 머리를 맞대기도 했다. 그만큼 그에게 이웃 상인들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됐다.
40년을 한 장소에서 한 결 같이 시장을 지켜온 신원범씨의 마지막 바람은 아들이 빨리 결혼하는 것이고, 대를 이어 '신일상회'가 100년이 가는 장수기업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다. 이제는 가게에서 가끔씩 친구들과 소주 한잔 하면서 소싯적 이야기를 나누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하는 신씨의 모습에서 사업가 이전에 푸근한 할아버지의 인상을 보게 된다. '행복의 파랑새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운 데 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90년대만 해도 북적북적 사람들로 넘쳐났는데… (한숨) 그 시절이 다시 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그건 욕심일 뿐이겠죠. 그저 사람 냄새라도 매일 맡으면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갔으면 좋겠네요. 요즘엔 정말 사람들이 너무 없어서 더 추운 느낌이에요. 물건도 싸고, 값도 저렴하니까 많은 관심 가져주시고 찾아왔으면 좋겠네요. 대형마트 부럽지 않은 가격과 인심까지 몽땅 나눠드릴 테니까요(웃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1.01.06 12:23 | ⓒ 2011 OhmyNews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