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선물로 받은 헌 겨울 외투

등록 2011.01.14 14:52수정 2011.01.1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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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월 14일)은 날씨가 유난히 더 추운 것 같습니다. 겨울 날씨는 추워야 제 격이라고 하지만 없는 사람에게 날선 추위는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은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가 될 것 같다는 기상 예보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군요. 아이들 챙겨 학교 보내고 아내와 단 둘이 앉아 된장국을 상 가운데 놓고 모처럼 오붓하게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아내와의 연애 시절, 다른 데 반한 게 아니었다며 아내는 낡은 레코드판에서 나오는 흘러간 노래 가사처럼 반복해서 얘기합니다. 하얀 앞치마 두르고 된장국에 김치 하나라도 당신과 함께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이 말은 결혼 전 제가 아내에게 한 말입니다.

 

기름 값이 많이 올랐다며 거실 보일러를 잠궈 입김이 짙게 들락거립니다. 아내는 못 보던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있습니다. 옷에 대해 취미가 없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여자의 옷이라는 게 구색 맞추어 입으려면 그 값이 만만치 않을 터인데, 작은 농촌 교회 사모로서 이런 데 관심을 두면 생활이 더 팍팍해질 것은 뻔합니다. 따라서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속 편할 것입니다.

 

"어, 못 보던 외투를 걸치고 있네? 그거 또 처제가 보낸 거예요?"

 

우리보다 살기가 조금 더 나은 처제는 언니의 어려운 생활이 늘 눈에 잡힌다며 자기가 입던 옷가지를 가끔 보내옵니다. 그럴 때 좋아라 하는 아내가 제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한동안 옷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자족하는 아내가 어찌 보면 안쓰럽습니다. 언니가 동생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 윤리에 맞는 내리사랑이 될 텐데, 아내는 그런 윤리에조차 무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외투,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길이하며 소매 치수가 나한테 이렇게 맞을 수가!. 색상도 겨울 외투론 딱이구요."

 

이렇게 말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꾸 기어들어갈려는 말 꼬리는 본인도 정작 느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아내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달란트(재능)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노인 분들을 섬기는 데는 아주 뛰어납니다. 뛰어나다는 것이 기술만으로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을 친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모실 마음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을 일입니다. 언제부턴가 섬기는 데도 자격증이 필요할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따더니 내친 김에 1급에 도전해 보겠다며 지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농촌 교회일수록 사모의 역할이 많아집니다. 성탄절이 낀 연말연시에는 더 그렇습니다. 또 기회가 사라질 것 같다며 그래도 한 번 시도나 해 보겠다고 시험 한 20 여 일 앞두고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남편인 저에게 어렵게 허락을 구해왔습니다.

 

"여보, 딱 2 주만 도와주세요. 빨래, 설거지, 집안 청소에 신경을 좀 써줘요. 딱 2주만요. 그 사이 나는 독서실을 끊어 공부를 해야 되겠어요."

 

그리고 한 독서실을 정해 아침 일찍 나가서 자정이 넘어 들어오는 생활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독서실 나간 지 며칠이 지나서였습니다. 고희(古稀)를 막 넘긴 아주머니(본인이 굳이 할머니가 아닌 아주머니라고 불러주기를 원한다고 함)가 독서실 관리를 하고 있는데, 그분과도 쉽게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컵 라면에 찬밥을 말아 같이 먹기도 하고, 함께 차를 나누기도 하며 쉼의 시간을 갖는다며 아내는 무척 좋아했습니다.

 

어제는 그 아주머니가 아내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고 합니다. 안 입는 겨울옷이 있는데, 사모님한테 맞을 것 같아 챙겨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 입을 의향이 없느냐며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더랍니다. 아내는 단벌 신사입니다. 옷이 없는 것이 주 이유이겠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이 좀 민망하게 생각할 정도로 옷에 대해 무디기도 합니다. 농촌 교회의 어려움은 사모님으로부터 상징적으로 드러나기 쉽습니다.

 

지난 달에는 일 주일에 한 번 서울까지 상담 교육을 다녔는데, 가르치는 교수님이 한 마디 했다며 무덤덤하게 전했습니다.

 

"김천 사모님, 오늘까지 4주째 같은 옷만 입고 오시는 이유가 있어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를 떠나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이다 보니 가볍게 던진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농촌 교회의 어려운 현실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라며 아내는 서운한 감정을 저에게 토로했습니다.

 

이렇게 생활하는 아내가 며칠 전 독서실 아주머니에게도 비슷한 생각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내는 좋다며 그 외투를 받아 오늘 독서실로 그 외투를 입고 출근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기본 생활을 이야기할 때 '의식주'라는 표현을 씁니다. 입고 먹고 자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 중 왜 '의'(입는 것)가 앞자리를 차지할까? 저는 의아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동양의 형식 문화, 체면 문화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봅니다.

 

아내가 입는 옷에 무감각하듯 생활하는 데에는 남편인 저의 책임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입는 것에 대한 고려는 대단히 미미합니다. 한 가지 옷으로 한 철을 나는 때가 많으니까요. 굳이 변병을 한다면 외모보다는 내면을 더 중요시하는 생활 철학을 들먹일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 서울 볼 일이 있어 올라갔다가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과 서울역 그릴에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끝나고 나오는 길에 그 목사님은 짬을 내어 여성 의류 매장에 가서 옷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내의 심기가 불편할 때 저에게 던진 말이 갑자기 귓전을 때렸습니다.

 

"양말 한 짝이라도 당신한테 얻어 신어 봤으면... ."

 

참 무능한 남편입니다. 이 세상 살면 얼마나 오래 산다고, 가치 있는 삶이 그 뭐라고 아내가 받고 싶어 하는 양말 한 짝 선물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남이 입던 옷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고 나들이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못난 남편을 좋은 남편 훌륭한 남편으로 생각하고 한 눈 팔지 않고 내조해온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짧은 기간이 아닌 20이 넘는 성상이나...

 

결혼하기 전 아내에게 한 말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라면 김치 하나에 된장국만 있으면 그 식사가 맛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같은 옷을 입더라도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가족을 아니 이웃을 특히 연로하신 분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것으로 저는 좋습니다. 아래만 보고 섬기는 삶을 살면 세상의 좋은 것 높은 것이 보이지 않아 좋습니다.

2011.01.14 14:52ⓒ 2011 OhmyNews
#헌 겨울 외투 #아내 #독서실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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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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