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 덕분에 군 생활 '제대로' 했습니다

1970년 그해 겨울 '발랑리'... 1· 21 사태의 추억

등록 2011.01.20 19:07수정 2011.01.2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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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군대생활을 '오지게' 했다. 그 까닭은 군 입대 전해인 1968년 1월 21일, 이른바 김신조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은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휴전선을 넘어왔다. 이들은 한국군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유유히 청와대 어귀 세검정고개 자하문까지 침투하였다. 경찰이 검문하자 이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시내버스에도 총탄을 난사하여 비상 출동한 종로서장이 순직하고 귀가하던 시민들이 사상을 당했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비태세로 이들을 추격하여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는데, 그가 김신조였다.

이튿날 김신조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기자회견에서 "청와대 까부수고 박정희 모가지를 떼러 왔다"고 하여 전 국민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사병들의 복무연한이 36개월로 연장되었으며, 국군의 군사훈련도 매우 강화되었다.

이들 특수부대원은 완전군장으로 한 시간 10킬로미터를 행군하였다고 하여, 광주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우리 교육생들은 교육기간 16주 내도록 정강이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다녔고, 실무부대에 배치되고서도 일주일에 한 번씩 완전군장에 20킬로미터를 행군하는 훈련도 했다. 게다가 부대 배치 직후부터 '5분대기조' 소대장으로 명받아 비상출동에 대비하여 취침 때 군화끈도 풀지 못할 정도로 늘 긴장 속에 근무했다.

"청와대 까부수러 왔다"... 김신조 사건으로 더욱 고됐던 군복무

1969년 겨울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DMZ 부근 한강 둑에서 경계 잠복근무로 무척 고생했다. 


이듬해 가을 부대 교체로 양주군 광적면 가납리 대대본부로 이동하여 자대근무를 했는데 그곳은 예비부대로 교육이 주 일과였다. 그런데 그 교육생활이 더 고달팠다. 잠복근무는 추위 때문에 고생했지만, 오전 오후 내도록 계속되는 교육은 교육자도, 피교육자도 모두 지치게 했다.

그런 가운데 대대본부에서 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직책은 대대탄약작업소대장으로 김신조 루트 경계근무 명이었다. 대대탄약작업소대는 전시 때 대대 장병들에게 탄약을 보급해 주는 게 주 임무이지만, 평시에는 대대직할 소대로 경계임무가 주였다.


완전군장으로 소대원을 이끌고 간 곳은 당시 파주군(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라는 마을 뒷산 산골부대였다. 우리 부대는 그 산등성 초소, 이른바 김신조 루트 길목에 잠복하며 밤새 경계하는 임무였다. 그날 부대를 찾아가니 부대막사는 발랑리 뒷산 7부 능선 계곡의 땅굴이었다. 그곳은 문명의 이기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도 없는 산중으로 거기서 군장을 풀고 두더지처럼 1970년 그해 겨울을 보냈다.

 그 무렵 동고동락했던 소대원들(뒷줄 가운데 모자 쓴 이가 필자)
그 무렵 동고동락했던 소대원들(뒷줄 가운데 모자 쓴 이가 필자)박도

산속의 겨울은 낮 시간은 무척 짧고 밤 시간은 길었다. 오전 9시가 넘어야 뒷산 등성이로 떠오른 해는 오후 4시면 앞산 고갯마루로 졌다. 나머지는 긴 밤이었다. 밤 시간은 태고의 정적 그대로이거나 세찬 바람 소리뿐이었다. 땅굴막사는 고지로 연료도 보급 받지 못해 산에서 나무를 해서 밥을 짓고, 내무반은 통나무 토막을 난로에 넣어 난방을 했다. 땅굴막사는 석유등불로 24시간 불을 밝혀야 할 정도로 어두웠다.

우리소대는 병력을 3등분하여 2개조는 잠복초소를, 나머지 1개조는 소대막사를 지켰다. 아침 느지막이 근무조가 철수하면 아침밥을 먹은 뒤 오전 취침을 하고, 12시 점심을 먹은 뒤 다시 취침했다. 오후 5시 저녁밥을 먹고, 다시 잠복초소로 가는 단순한 생활이었다.

멍석 이야기, "소대장님은 그냥 모른 척 해주십시오"

 땅굴막사 앞에서 필자(1970년 겨울)
땅굴막사 앞에서 필자(1970년 겨울)박도
어느 하루 소대내무반에 갔더니 땅굴막사 바닥에 짚을 깔고 지냈다. 땅굴 바닥에서 습기가 올라오자 마을에서 짚을 얻어다가 깔아 습기를 막았는데 그 먼지에 목이 메이고 화재의 위험성도 있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내무반장에게 마을에서 짚을 얻어다가 멍석을 짜 바닥에 깔면 먼지도 일지 않고, 화재 위험성도 없을 거라고, 멍석을 짜라는 지시를 했다.

그 며칠 후 소대내무반에 들어가니 내무반 바닥에 망석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내무반장에게 그새 멍석을 다 짰느냐고 물었다.

"멍석 짜는 게 장난이 아닙니다. 마을에 짚을 구하고자 갔더니 산촌이라 짚이 귀해 얻을 수도 없을뿐더러, 멍석 하나 짜자면 겨울이 다 지날 테고, 언제 다시 부대 이동할지 모르는 처지이기에 한밤중에 마을로 내려가 어느 집 뒤꼍 처마 밑에 달아놓은 멍석을 하나 업어왔습니다. 소대장님은 그냥 모르는 척 해주십시오."

나는 내무반 바닥에 깔아놓은 멍석을 당장 걷어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말은 차마 못했다.

참 추운 겨울이었다. 설날을 며칠 앞둔 날 양주군 광적면부녀회에서 우리 소대원에게 떡국을 끓여준다고 군목이 대여섯 부녀자를 인솔하여 산중부대까지 올라왔다.

그해 긴 겨울이 끝날 무렵 갑자기 부대교체 명령이 내려왔다. 우리 소대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완전군장을 꾸리고 출발준비를 했다.  그 바쁜 와중에 나는 내무반장에게 내무반 멍석을 제자리에 갖다 두고 오라고 지시했다.

우리 소대가 이동한 곳은 발랑리마을에서 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양주군 광적면 비암리 마을 앞산 계곡이었다. 부대 이동 뒤 비상 첩보전화도 확인 겸 전화가 가설된 마을이장 집으로 인사차 갔다.

"이번에 온 부대가 발랑리 마을에서 왔소?"
"네, 그렇습니다."
"그 마을에 내 사촌이 살지요. 그 아우가 그러더구만요. 이번 부대는 양심이 곱더라고요."
"네?"

"지난 겨울 산에서 군인들이 내려와 짚을 달라고 하기에 쇠죽 여물용 짚이라고 딱 잘랐더니 이튿날 아침 뒤꼍의 멍석이 보이지 않더래요. 그래서 뒷산 군인의 소행으로 짐작이 갔지만, 얼마나 추웠으면 그걸 가져갔을까 싶어 포기하고 말았는데, 부대 이동 날 멍석을 제자리에 갖다 두고 가서 엄청 고마웠다나요."
"아, 네,"

나는 그 칭찬이 멋쩍어 뒤통수를 긁적이며 부대로 돌아왔다.

오래 전, 그 옛날이 그리워 아내랑 그곳 일대를 찾아가자 부대자리는 흔적도 없고, 대신 아파트단지와 골프장으로 어리둥절케 했다. 하기는 그때 무장공비로 내려온 김신조가 지금은 서울의 한 교회 목사님이 될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아마도 지금의 휴전선 155마일 철조망도 그 언젠가는 흔적도 없어질 테고, 후세인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들이 한낱 전설로 남을 게다.
#김신조 #발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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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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