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적인 이씨는 "우리는 돈에만 꽂혀 살지 않는다"고 말했다.
구영식
30여분을 걸어 도로쪽으로 나왔다. 안양3동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다시 콜이 뜨기를 기다렸다. 기자의 시계는 오후 1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0분 정도 콜을 기다리다 없자 버스를 타고 첫콜을 찍은 곳으로 이동했다. 버스 안에서도 이씨는 계속 단말기를 들여다봤다.
"눈이 아주 피곤해요. 캄캄한 곳에서 좁은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대리운전기사들은 노안이 빨리 와요."이씨에 따르면, 전국에 등록된 대리운전기사수는 4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하루에 대리운전일을 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전국 20만명, 수도권 10만명 정도다.
첫콜을 찍은 곳으로 이동해 30분을 기다린 끝에 두 번째 콜을 찍었다. 이번에도 첫콜을 찍을 때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두 번째 손님은 축구를 좋아하는 사업가. 도착지는 수원 정자동, 콜비는 1만8000원. 그는 "1주일에 4번 정도 대리운전기사를 부른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대리운전업계를 좀 알고 있었다.
"최근에 (대리운전 중개업체를) 15XX에서 16OO으로 바꿨어요. 15XX이 좀 건방지더라고요. 그런데 기사님, 수원 정자동은 차가 적어 콜을 잡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떡하죠? (수원 최대 유흥지인) 인계동까지 갔어야 하는데…."두 번째 손님은 친절하게 이씨의 '빽콜'까지 걱정해주었다. 20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이씨에게 1만9000원을 건네주었다. 원래 받기로 한 콜비보다 1000원을 더 준 것이다. 이씨가 "지갑을 탈탈탈 털어서 주더라"며 웃었다.
이씨는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두 번째 콜의 도착지는 아파트 지역이라 빽콜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40분을 걸어 수일지하차도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셔틀'을 타야 한다. '셔틀'은 대리운전기사들만을 태우는 봉고차다.
"사실 이것도 불법인데, 몇개 회사들이 노선별로 셔틀을 운행해요. 30분마다 운행하기 때문에 대리운전기사들은 셔틀노선을 꿰고 있어야 해요. 거리에 따라서 1000원~3000원의 요금을 받아요. 콜비 1만9000원 받았는데 택시타고 다시 안양에 갈 수는 없잖아요? 셔틀은 3000원만 내면 되는데…. 새벽 4시 30분까지 운행해요. 대리운전기사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을 많아요.(웃음)"수일지하보도에 도착한 지 20여분 후에 셔틀이 도착했다. 셔틀 안에는 이씨를 포함해 13명의 대리운전기사들이 타고 있었다. 30대와 40대가 가장 많아 보였다. 모두 단말기만 들여다보고 있다. 오전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셔틀 안에는 '딩동' 소리(콜이 뜰 때 나는 소리)만 가득했다.
이씨도 셔틀 안에서 콜을 확인하느라 바빴다. 안양에 들어온 이후 콜을 하나 찍었는데 고객이 취소했다.
"손님이 몇분 정도 걸리냐고 해서 '7~8분이면 된다'고 했더니, '그럼 됐어요'라고 하네요. 그래서 콜센터에 보고하고 (벌금부과 대상에서) 빼달라고 했어요. 이런 경우 콜센터에서 '왜 7~8분 걸린다고 했느냐?'고 따지기도 해요. 왜냐하면 그 콜을 제가 찍어서 가야 콜센터도 수수료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대리운전은 운전하는 게 아니라 걷는 직업?오전 1시 25분께 다시 두 번째 콜을 찍었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씨의 차안에서 콜을 기다리는 동안 기자의 눈꺼풀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배도 고파왔다.
- 이 기사님, 설렁탕 한 그릇 먹고 콜 받으면 안될까요?"우리는 콜을 받는 중에는 식사를 안해요. 언제 좋은 콜이 뜰지 모르기 때문에요. 식사는 일이 다 끝난 다음에 하죠. 졸아도 안돼요. 저는 올빼미 체질입니다."
다른 대리운전기사들에 비해 설렁설렁 움직이는 이씨지만 기자가 보기에 지독하리만치 일에는 철저했다. 그가 결국 기자에게 한방 먹였다.
"돈, 돈 하는 대리운전기사를 취재했어야 하는데, 구 기자는 아주 편하게 취재하는 것 아니에요?(웃음)"대리운전의 '피크타임(peak time)'은 오후 11시 30분부터 오전 1시 30분까지다. 실제로 이씨의 단말기에 뜨는 '수도권 총콜수'가 400여건에서 200여건으로 크게 줄어 있었다. 그는 "12시만 넘어서면 인내력 싸움"이라고 말했다. 특히 콜수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오전 3시대에 찍는 콜을 '보너스콜'이라 부른다.
오전 2시가 넘어 세 번째 콜을 찍었다. 이번 손님은 20대 헬스 트레이너다. 도착지는 분당, 콜비는 2만 원. 그가 이씨에게 "단골이 있죠?"라고 물었다.
"최근에 손님을 한분 태웠어요. 그분이 저녁에 술을 먹은 뒤 가끔 강원랜드에 가서 카지노를 한다고 해요. 보통 택시를 이용하는데, 35만 원을 준다고 얘기해요. 그래서 제가 '대리운전기사를 쓰면 25만 원만 주면 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연락한다면서 명함을 가져가더라고요." 두 사람은 '십자인대 파열'을 두고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세 번째 콜을 찍기 전부터 눈꺼풀이 무너져가던 기자는 결국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졸고 말았다. 깨어보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콜비 2만 원을 받은 이씨가 셔틀을 탈 수 있는 범계역까지 걸어가자고 했다. 우리가 걸어간 인도는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아 언 상태였다. 춥고, 졸리고, 배고픈 기자는 이씨의 발뒤굼치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걸었다.
"대리운전 10년 하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리운전이 운전하는 직업이 아니라 계속 걷는 직업이라고요. 기다리고, 운전하고, 걷고…."약 50분을 걸어 셔틀을 탈 수 있는 범계역에 도착했다. 오전 3시 20분. 셔틀 안에는 '보너스콜'(오전 3시대에 찍는 콜을 이르는 용어)을 노리는 대리운전기사들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이씨의 단말기에 뜨는 '수도권 총콜수'는 이미 100건 이하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이날 7시간 동안 대리운전을 뛰어 이씨가 쥔 수입은 4만9000원(팁으로 준 1000원 포함)에 불과했다. 하지만 수수료 9600원(4만8000원의 20%)를 빼면 4만 원도 안되는 수입이다. 그래도 낙천적인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저와 아내는 돈에만 꽂혀 살지는 않아요. 오히려 돈 많은 사람들이 돈 걱정하고 살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커피숍에는 못들어가요. 대리운전기사들은 돈을 배포있게 못써요. 대리운전기사들 사이에는 '내가 쏠게'가 없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