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 (45)

45. 물병 속의 바다

등록 2011.02.05 13:37수정 2011.02.0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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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물병 속의 바다

 

밤 바다, 한 순간 .
밤 바다, 한 순간.일러스트 - 조을영
▲ 밤 바다, 한 순간 . ⓒ 일러스트 - 조을영

 

이윽고 12시가 되었다. 인형웨이터는 황급히 텔레비전 앞으로 우리를 끌고 가서는 다 같이 손을 꼭 쥐라고 했다. 무엇이 어찌 될지 몰랐기에 우리는 어리둥절하게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만 했다.

 

"전원 켜요?"

조제의 말에 인형웨이터는 신나고 들뜬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래, 우리 이쁜이는 그냥 있고 못생긴 너가 얼른 켜봐."

 

화면이 켜지자 잠깐의 침묵이 흐르더니 이윽고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실루엣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깊고 깊은 어둠만으로 가득 채워진, 두꺼운 캔버스 천 위에 수십 번도 넘게 덧칠한 두터운 마티에르를 가진 청빛과 회색, 검은색이 조화를 이룬, 그런 지독한 어둠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조그마하고 작게 흔들리는 작은 노랑 빛이 화면 위로 스며들었다. 흔들리듯 깜빡이던 그 노랑의 점은 어느 틈에 조금씩 커지더니 거대하게 투명하고 밝은 빛으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리곤 그 가운데 선홍의 점이 부적처럼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저게 뭐죠?"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에잉, 그놈의 눈이야!"

 

인형웨이터는 황급히 대답하곤 우리의 손을 쥔 손에 힘을 불끈 주더니 뭐라 말할 새도 없이 폴짝 뛰었다. 이윽고 아득한 현기증과 함께 몸이 약간 붕 뜨는 느낌이 있었고, 잠시 후 가벼운 떨림과 함께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곧이어 시원한 공기가 코끝으로 스며들어서는 폐부까지 깊이 찾아들더니 곧이어 끈적하고 눅진한 한 줄기 바람이 목 뒤꼍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떴을 땐 사방이 지독한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항구 끝까지 가야 해."

그 적막을 깨고 인형웨이터는 다급히 말했다.

"어떻게 가는 건데요? 우리가.."

내가 떨리는 소리로 말하자 그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아래쪽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나도 무심결에 그를 따라서 아래를 내려 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마어마한 바다의 몇 백 미터 상공쯤에 우리 셋이서 손을 잡고 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린 지독한 높이의 창공에서 바다를 향해 추락하기 일보 직전인 환상세계에 들어와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거야 원, 악몽? 아니지, 꿈은 아닌 것 같고..뭐 어떻건 어떤 경로로 여기 왔는지 모르지만 대단히 위험한 곳에 들어와 버렸군요! 자칫하다간 생애 최고의 번지 점프를 하게 되겠는 걸? 아예 서비스로 바닷물에 잠수 하는 혜택까지 받아가면서?"

조제는 심통스럽게 우물거리면서 바람에 몸이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우리 애기들,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다 싶으면 발끝에 힘을 모아서 원하는 높이의 목표 지점을 정해봐. 그리고 톡하고 몸을 위로 튕겨. 그럼 폴짝 몸이 떠오를 거야. 자, 그럼 더 높게 올라가 보자구."

인형웨이터는 우리와 손을 놓고 먼저 시범을 보였다. 그는 발끝을 탄력 있고 힘차게 튕기더니 우리의 머리보다 높은 위치로 몸을 밀어 올려서는 풍선처럼 가벼이 허공에 떠올랐다.

 

나와 조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를 따라서 했고, 여름날 열어둔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에 날아 가 버린 한 장의 엽서처럼 우린 정처 없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두둥실 떠올랐다. 귀 밑을 스쳐가는 밤바다의 공기는 싱그러운 초여름의 터질 듯한 향기를 뿜고서 주체 못할 희망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그건 닿을 곳이 어디건 간에 지금 이 순간이 최고로 소중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그런 기분을 가지게 했다.

 

이윽고 우리가 새라도 된 양 양 팔을 저어가며 앞으로 날아가고 있을 때, 항구의 불빛이 멀어지고 저 멀리 등대가 서 있는 작은 섬 하나가 아련히 다가왔다. 그 불빛에 비친 파도가 바람에 간간히 움직이면 섬의 바위들이 조금씩 하얀 몸을 드러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꽤 무게 있는 파도가 한번 씩 불어 올 때면 그 단면에 몸을 부셔 버리는 파도는 한산한 커피숍, 단정한 제복의 종업원이 탁자로 들고 온 투명한 아이스 커피 보틀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병 안으로 얼음을 쏟아붓는다. 블랙 커피의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지만 손님 앞에서 그 황홀한 순간을 제공한다는 우쭐함에 단정한 제복은 입가의 미소 만큼이나 깨끗하게 빛난다.  바다는 크고 둥글며 거대한 커피병, 그리고 그 안에 뜬 얼음 같은 섬들, 그리고 우리 셋은 공중에서 갈매기 마냥 홀연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서 철썩이는 파도와 함께 검은 실루엣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계속>

2011.02.05 13:37ⓒ 2011 OhmyNews
#중간 문학 #판타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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