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영토. 그림 출처는 고등학교 <국사>.
교육인적자원부
대조영이 그만한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그가 비상한 두뇌와 무예, 충실한 부하들에 힘입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식의 느낌을 주었다. 이런 관점은 틀리지는 않지만 구체적이지는 않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대조영의 성공비결을 다섯 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다.
우선, 대조영의 선천적 유산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쓴 <발해고>에서는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걸걸중상이 요동(만주) 송화강 유역의 부족장이라 했다. 대걸걸중상이 실제로는 고구려 최후의 왕인 보장왕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어느 견해를 따르든 간에 대조영이 높은 신분을 타고났음에는 틀림이 없다.
남들 앞에서 자신의 성공비결을 설명할 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르침·기질·신체·재산·명예·지위 등을 쏙 빼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아무리 못 배우고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부모의 도움을 받기 마련이다.
하물며 대조영처럼 고위 신분을 타고난 사람의 성공비결을 다룰 때는 부모의 영향을 가장 먼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들보다 유리한 지점에서 인생을 시작했다는 점은 대조영의 성공비결을 논의할 때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둘째, 대조영은 높은 신분에 만족하지 않고 지도자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조선 같은 문인사회에서는 문장에 능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지만 고구려 같은 무인사회에서는 무예에 능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게 이치적이다. <발해고>에서는 대조영이 용감하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그가 자기 사회에서 요구되는 지도자의 자격을 구비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쌓은 무예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20세 전후에 고구려 장수가 되었고, 그 덕분에 고구려 멸망 후에는 잠재적인 대권주자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무예보다는 작문을 더 좋아했거나 '아버지 백'만 믿고 허송세월했다면, 당시 같은 혼란한 세상에서 영웅으로 떠오르기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