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리 선사취락지청동기시대 마을은 강에서 떨어진 구릉지대에 마을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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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동 선사유적지는 한강근처 낮은 평지에 있습니다. 아직 농경이 본격화되지 못해서 농사만으로는 식량을 다 충당하지 못했던 신석기인들의 주거지는 바다나 강 근처에 있었습니다. 수렵이나 어로로 보충되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청동기시대가 되면, 마을의 위치는 변합니다. 충적지 평야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산구릉으로 대략 해발 75미터에서 100미터 사이에 마을이 들어섭니다. 이른바 배산 임수지형이 생기게 된 거죠. 청동기시대 마을이 이렇게 농경지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된 이유가 뭘까요?
신석기시대에 농업혁명이 일어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는 해도, 신석기 유적에는 대규모 밭이 없습니다. 집 앞 텃밭이나 아니면 저습지를 이용해서 조금씩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 시대에 한반도는 온통 수풀이 울창하였던 때거든요.
이 숲을 개간해서 밭으로 만드는 일은 한 가족에겐 불가능한 일입니다. 연구에 의하면 숲을 개간해서 밭으로 만드는 데는 5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먼저 나무를 베고 난 뒤 불을 지르고 그 뒤에 뿌리가 썩기를 기다립니다. 살아있는 나무뿌리는 돌도끼를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죠. 드러난 나무뿌리에 돌이나 동물의 뼈, 혹은 나무로 된 정을 꽂아두면 차츰 뿌리가 썩어갑니다. 그 후에야 나무뿌리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력을 기울이는데 한 가족이 다 매달리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이죠. 온 식구가 종일 먹을 것을 찾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도 평균연령 20세를 넘기기 어려운 때였으니까요. 이런 때에 식구가 불어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그 식구를 먹여 살릴 경작지는 만들어지지 않으니까요. 폴리네시아인들의 몰락은 신석기에 머물러야만 했던 그들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바로 청동기시대. 그것은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표현됩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이 새로운 시대는 이 슬로건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청동기시대를 열었던 사람들은 특별히 신석기시대보다 달라진 생산도구를 쓰기 않았습니다. 여전히 돌도끼가 유일하고도 중요한 도구였지요. 도구의 변화 없이도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힘의 비밀은 '협동노동'입니다. 우리 단군신화에도 표현되었듯이 '풍백, 운사, 우사'와 같이 농사에 필요한 지식을 갖춘 과학자와 협동노동을 지휘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대규모 경작지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엔 없었으나 청동기시대에 최초로 탄생한 것이 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