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랜만에 오래된 벗들과 여행을 떠난다. 눈을 뜨자마자 접한 소식은 목적지로 정했던 속초에 47cm의 폭설이 내렸다는 것. 차편과 숙소를 미리 예약해 놓은 상태라 취소는 불가능한 상태였고, 우리는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속초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가는 길이 미끄러워 오래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쉽게 보기 힘든 풍경을 만날 생각에 설레기도 한다.
인제까지 가는 동안은 뉴스를 통해 접한 소식이 마치 거짓말 같다. 매끈한 도로가 우리의 여행길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화양강 랜드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를 한 후 다시 출발하자마자 만난 도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
미시령을 지나면서부터는 도로 곳곳에 오도 가도 못하고 눈속에 파묻힌 차들도 보인다. 미처 체인을 준비하지 못해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사람들, 제설 작업을 나온 차량들과 대민 봉사활동을 나온 군인들을 스쳐 지나가며 눈길이 무색하게도 우리가 탄 버스는 잘만 달린다. 기사님의 훌륭한 드라이빙 실력 덕분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백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설경에 시선을 뺏겨 있다 보니 어느새 속초에 도착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숙소를 가기 위해 도로가로 나갔다.
"삿포로야. 삿포로."
안전하게 도착도 했겠다, 이내 안심이 된 우리는 이제 한껏 들떠 있다. 눈이 잔뜩 쌓인 거리의 모습을 보며 마치 눈이 많은 일본 삿포로의 거리에 서 있는 기분이라며 가보지도 못한 지역을 들먹인다. 진귀한 풍경에 넋을 잃고 숙소까지 걸어가 짐을 맡기고 우리의 첫 목적지인 아바이 마을로 향한다.
속초여행의 첫 코스로 아바이 마을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불판에 구워먹는 생선구이에 끌렸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청호동과 중앙동을 이어주고 있는 갯배를 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방영된 지 한참이 지난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주인공 은서와 준서가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스쳐 지나가던 장면으로 유명해진 아바이 마을과 갯배는 최근 <1박2일>에 등장해 또 한번 시선을 집중시켰던 곳이기도 하다.
왜 이곳을 아바이 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아바이 마을의 행정상 이름은 청호동이다. 한국전쟁 이후 함경도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휴전선에서 가까운 바닷가에 집을 짓고 촌락을 형성하여 살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나이 든 사람들이 많아서 아버지의 함경도 사투리인 아바이를 따서 아바이 마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바이 마을의 명물로 자리 잡은 갯배는 일제 말기에 속초항이 개발되면서부터 그 세월을 함께하고 있다. 예전에 청호동과 중앙동이 맞닿아 있던 것을 준설, 외항과 내항이 통수되고 수호가 형성되자 속초읍에서 갯배를 만들어 도선에 이용하게 되었다.
한국 전쟁이 나고 없어졌다가 전쟁 후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되면서 1955년 속초읍에서 지금 모양의 갯배를 만들어 5구에 관리를 맡기게 되었고, 1961년도에 1척을 더 만들어 정식 도선업 허가를 받아 재향군인회 속초지회에 위탁하여 운영하게 하였다. 이후 1988년 다시 청호동 개발위원회에 위탁해서 운영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고, 현재의 갯배는 1992년에 4천만 원을 들여 35인승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선으로 개조한 것이다.
갯배는 이른 새벽 4시 30분부터 오후 11시까지 운행하며 그곳 주민들은 무료로 이용을 할 수 있다.
생선구이집의 원조로 유명한 '88생선구이'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갯배를 타러 향했다. 요금을 지불하는 곳이 건너편 청호동 선착장에 있어서 일단은 그냥 배에 탑승했다. 갯배의 선장님께서 끌대로 줄을 잡아끌면 순식간에 건너편 선착장으로 이동한다. 많은 여행후기들을 통해 승객도 함께 끌어야 한다는 글을 봤던 터라 시키지 않아도 너도 나도 줄을 끌어보려고 한다. 일행들은 처음 해보는 작업이 재미있는지 시종일관 낄낄댄다.
아바이 마을로 건너오니 선착장 바로 앞에 아저씨가 앉아 요금을 받는다. 요즘 시대에 200원이라니, 무임승차나 다를 바가 없는 가격이다. 요금 안내판에 적힌 글귀가 재미있다. '사람 편도 200원, 자전거 편도 200원, 손수레 편도 200원' 그렇다면 사람이 손수레에 자전거를 실고 타면 600원인건가? 재미있자고 적은 글인데 적고 나니 정말 궁금해진다. 전화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
아바이 마을의 입구에는 <가을동화>의 촬영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그것도 알아볼 수 없는 일본어로 적혀 있다. <가을동화>를 본 일본 팬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드라마가 외국에서 인기를 얻고 덕분에 드라마 촬영지들이 외국 관광객들의 코스가 된 경우가 많다. 짭짤한 외화벌이를 위해서 드라마 촬영지 섭외하는 분들도 골머리 좀 앓겠구나.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은서네 집이라는 노란 간판이다. <가을동화>가 방영될 때는 드라마에 열광하던 때가 아니라서 눈여겨 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슈퍼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느새 식당으로 둔갑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곳에서 세를 내어 슈퍼를 하던 주인은 전파를 탄 후 떼돈을 벌어 3층 건물을 사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소문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쁜 소문은 아니니 다행이다.
나는 은서네 집을 바라보고 있는데 일행들은 다른 데 한눈이 팔려있다. 은서네 집 맞은편에 위치한 초상화를 그려주는 가게 입구에 전시된 그림들을 보면서 짐짓 화폭에 자신의 초상화를 담고 싶어 하는 눈치다. 원래 아바이 마을을 둘러보며 보내려고 계획했던 시간은 1시간으로 촉박하지만 우리는 여유로운 여행객, 하고 싶은 것은 해야지. 한 장 그리는 데 만원, 못생긴 분은 무료란다. 못생겼다고 우기고 그림 한 장을 얻어낼까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안 먹힐 것 같다.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못생긴 얼굴도 아니라고 나름 자부하며 산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화가 선생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 종로3가에서 그림을 그리던 분이 작년에는 낙산해수욕장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다 흘러 흘러 속초로 오게 되었고, 아바이 마을이 좋아서 이곳에 정착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내년쯤에는 가까운 곳에 음악과 그림이 있는 카페를 하나 차릴 예정이라며 놀러오라는 말씀을 덧붙인다. 가게 안에서 흘러나오는 80~90년대의 음악들이 감미롭다. 음악 선곡을 보니 꽤 분위기 있는 카페가 만들어질 것 같다.
주인장 옆에는 귀여운 외모의 말티즈 한 마리가 곁을 떠나지를 않는다. 아픔이 있는 유기견을 데려다가 가족처럼 돌보고 있다고 한다. 이 자그마한 아이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주인이 조금만 떨어져도 짖어대며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일행 넷 중 2명이 모델이 되었고, 아주 만족스러운 그림을 들고 가게를 나왔다. 원하면 원래 얼굴처럼 그려주겠다고 말씀하시면서 10년은 젊어진 모습을 화폭에 담아주시니 모델이 된 일행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기분 좋게 가게를 나와 <가을동화>의 준서가 은서를 업고 걸었던 해변으로 향한다. 양쪽으로 즐비한 식당가 골목을 지나니 눈 앞에 눈으로 덮인 하얀 해변이 펼쳐진다. 시리도록 파란 바다와 눈부신 흰 눈의 조합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머릿속에 그려본 것이 전부였는데 직접 만나니 더 없이 반갑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 바다로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은데 정강이까지 차오르는 눈밭에 길을 만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따라 가보지만 이 개척자의 다리 길이가 얼마나 긴지 보폭이 너무 크다. 어그 부츠를 신었음에도 눈이 신발 속으로 자꾸만 들어간다. 간신히 바다와 가까워졌는데, 이번에는 자꾸만 덤벼드는 파도 때문에 곤욕이다. 뒷걸음질을 치다 결국 눈밭에 발을 담그고 말았다. '앗! 차가워'라고 말하면서 얼굴은 웃고 있다. 다시 해변을 걸어 나오며 뒤뚱거리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앞서 가던 일행이 넘어진 나를 카메라에 담으며 낄낄댄다. 사실 재밌으라고 일부러 몸소 몸 개그를 선보인 것도 모르고.
청초호와 아바이 마을의 전경을 보기 위해 청초대교로 오르기로 했다. 다리로 오르는 계단이 눈으로 뒤덮여 구분할 수 없어 조금은 위험해 보이지만 마침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이 있어 그것을 따라 걸어 오르다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 뻔했다. 난간을 부여잡고 기어이 오르니 다리 위의 도로 역시 눈 천지다. 덕분에 차들은 다니지 않고 넓은 도로는 고스란히 우리 차지가 되었다.
청초대교에서 바라본 호수의 모습이 고요하다. 물결은 한 치의 흔들림이 없고, 부둣가에는 가지런히 세워진 어선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 고요한 풍경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시인이 되고 싶었나 보다. 철교 난간에 적힌 한 구절의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눈으로 덮인 속초 바닷가 마을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으니 그 풍경 또한 압권이다.
감기 기운이 있는지 비염이 있는 동생이 자꾸만 재채기를 해대더니 사탕을 하나 빨아야겠다며 슈퍼로 들어갔다. 맨손으로 들어갔던 그녀의 손에 장갑이 하나 끼워져 있다. 차가운 날씨에 빨갛게 얼어버린 손을 본 슈퍼 아주머니가 은근히 따뜻하다며 챙겨준 주방용 비닐장갑.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웃어대면서도 아주머니의 인정이 느껴져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은영아. 따뜻해?"
그 얇은 비닐이 무슨 보온이 되겠냐만 그래도 예의상 물어본다.
"아뇨."
돌아오는 건 뻔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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