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의 첫 서양병원, '구암병원'에 얽힌 사연

사진과 기록으로 보는 '군산 의료사 100년' (1)

등록 2011.02.27 12:19수정 2011.02.27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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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도시로서의 군산은 개항(1899년)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112년 전 일이지요. 그런데 서양의료역사는 개항보다 3년이나 먼저 시작되었으니 115년이 된 셈입니다. 서양의료사로 115년이면 유구(?)하다고 할 수 있는 연륜이지요. 애석하게도 지역 백과사전 역할을 하는 군산시사(群山市史)에는 서양의료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필자는 실종 위기에 처한 군산의 '서양의료사'를 한 번 건져 올렸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제 나름대로 수집한 자료와 조사한 바를 근거로 제국주의 침략의 통로 도시 군산의 서양의료사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필자의 말>
우리나라에서 첫 서양식 의료기관은 1885년 2월 미국의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Allen H)'이 고종의 윤허를 받아 지금의 서울 종로구 재동에 개원한 '광혜원'(개원 12일 만에 '제중원'으로 개칭)이다.

 1896년 4월 의료선교사 ‘드루’와 ‘전킨’이 군산진영 터가 있었던 수덕산 기슭에 세운 포교소.
1896년 4월 의료선교사 ‘드루’와 ‘전킨’이 군산진영 터가 있었던 수덕산 기슭에 세운 포교소. 조종안

기독교의 호남 교두보였던 군산에서 최초의 서양식 진료는 1896년 4월 의료선교사 '드루'(A, D, Drew 유대모)와 '전킨'(W. M. Junkin 전위렴)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군산진영 수덕산 기슭 초가를 매입하여 포교소(교회)를 설립하고 의료 선교 활동을 개시했다.


두루와 전킨은 포교소 한쪽에 약방을 꾸며놓고 오전에는 전도를, 오후에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주민의 호응이 날로 좋아져 포교소가 발전하면서 하루에 50건 이상의 환자를 돌보았고, 무료 진료여서 계란, 생선, 조개류 등이 감사의 선물로 들어왔다고 한다.

 데이비스(좌)와 전킨(우). 군산 영명고 학생들이 데이비스의 삶을 기리는 기념비를 구암동에 세웠으나(1958년) 땅이 팔리면서 전주 외국인 묘지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데이비스(좌)와 전킨(우). 군산 영명고 학생들이 데이비스의 삶을 기리는 기념비를 구암동에 세웠으나(1958년) 땅이 팔리면서 전주 외국인 묘지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조종안

1896년 가을에는 서울에 머물던 데이비스(Linnie Davis) 여선교사도 합류하였다. 데이비스는 1898년 해리슨(Harrison) 선교사와 결혼하여 전주에 터전을 잡고 환자를 돌보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03년 41세 나이로 병사, 전주 선교사 묘지에 안장된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가 군산에 포교소를 세운 것은 선박이 자주 입출항하고, 비교적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며, 호남 대도시 전주로 통하는 초입에 있는 교통의 요지이고, 서양인에 대한 지역민의 인심이 호의적인 점 등의 여러 배경이 참작된 것이다.

일제의 압력으로 '구암병원'이라 불러

 두루 의료 선교사가 살던 집(사택). 옆방에서 예배도 봤다고 합니다.
두루 의료 선교사가 살던 집(사택). 옆방에서 예배도 봤다고 합니다. 조종안

 두루와 전킨이 진료와 복음 전파를 위해 타고 다니던 전도선.
두루와 전킨이 진료와 복음 전파를 위해 타고 다니던 전도선. 조종안

1899년 군산이 일제에 요구에 의해 개항되면서 수덕산 일대가 조계지역으로 지정되자 전도선(傳道船)이 정박하기 편리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구암산(현 군산시 구암동) 기슭에 건물을 짓고 '예수'의 번역 한자어 '야소(耶蘇)'를 붙여 '야소병원'이라 하였다.


당시 구암리 지명이 '궁멀'이어서 '궁멀병원'으로도 불렸던 '야소병원'은 기독교를 백안시한 일제의 압력 때문에 '구암병원'이라하였다. 드루는 '전킨' 선교사와 전도선을 타고 연안 도서지방을 순회하면서 진료도 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

1902년 미국 버지니아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Society Lying' 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 '토마스 다니엘'(Dr. Thomas A. Daniel)이 1904년 결혼과 함께 군산에 도착하여 드루와 전킨이 설립한 '구암병원'을 인수받는다.


다니엘은 간호 선교사인 케슬러(계순라)와 드루를 대신해서 진료와 전도활동을 활발하게 하였고, 선교의사 알렉산더(A. J. A. Alexander)도 합류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두 달이 못되어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귀국한다.

 구암병원이 있던 구암리(현 구암동)의 1900년대 초. 왼편 상단에 영명학교 건물이 보입니다.
구암병원이 있던 구암리(현 구암동)의 1900년대 초. 왼편 상단에 영명학교 건물이 보입니다. 조종안

다니엘이 물려받은 의료 시설은 낡고 보잘것 없었다. 작은 방에서 진찰하는 동안 대기실이 없어 환자들은 밖에서 추위에 떨며 애타게 차례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도 다니엘은 환자를 성실하게 돌보다 1910년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겨갔다.

급보를 받고 귀국하려던 알렉산더는 독립협회에서 활약하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군산으로 피신해 선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오긍선(吳兢善)에게 함께 도미할 것을 제의한다. 1902년 알렉산더와 미국으로 건너간 오긍선은 켄터키 주 센추럴 대학과 루이빌 의과대학을 수학, 1907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오긍선은 1909년 군산 영명중학교를 설립하고, 군산, 광주, 목포 등지의 '야소병원'장을 역임한다. 1912년에는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1934년 세브란스 의전 교장으로 일하면서 고아 구제 사업에 힘쓰다 1963년 사망했다.

 구암병원 2대 원장 ‘패터슨’ 의료선교사(좌)와 간호선교사 케슬러(우).
구암병원 2대 원장 ‘패터슨’ 의료선교사(좌)와 간호선교사 케슬러(우). 조종안

다니엘 후임으로 의사 '패터슨'(J. B. Patterson, 손배돈)이 부임하여 병원을 확충하고 입원실을 온돌방으로 건·개축하였다. 특히 진찰을 정확하게 잘하므로 그 의술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여 구암병원은 국내 유명한 병원 중 하나가 되었다. 패터슨이 구암병원에서 근무한 기간은 7년이었다.

1924년에는 의사 '브랜드'(Louis Christian Brand, 부란도)가 내한해 구암병원에서 농촌 순회 진료를 하는 등 기독교 전파에 진력했다. 그러나 브랜드도 6년 후(1930년)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겨갔다.

한국인 의사로는 세브란스의전 출신 강필구(1931년), 홍복근(1937년)이 있었다. 홍복근 아버지 홍원경(45년 작고)도 구암병원 의사였는데, 33세 때 영명학교가 주관한 3·5 만세운동(1919년)에 가담했다. (2001년 2월 28일 새전북신문 참조)

선교사들은 떠났어도 진료는 이어져

기독교 전파사업을 병행하면서 운영되던 구암병원은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의료 선교사들을 체포, 감금하고 강제로 추방하면서 문을 내린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일제는 1940년 11월16일 국내 선교사의 절반에 가까운 160명의 선교사와 자녀 49명을 추방했다. 이후 각지에 있는 선교병원은 한국인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운영권을 이양했는데, 일제는 이 병원들을 계속 감시, 탄압했다. 특히 선교부가 소유한 병원은 '적산'이라 하여 몰수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병원에 신사 설치를 의무화하여 기독교인 의사들이 신앙적 양심을 포기해야 병원사업을 할 수 있었다. 서양 의료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병원이 문을 내리자 한국인 의사였던 홍복근은 서래장터 물문다리 옆(중동 서래산 아래) 함석집에 '구암병원' 간판을 걸고 개업하였다.

 군산시 명산동 유곽시장(명산동 시장) 근처에 있었던 구암병원.
군산시 명산동 유곽시장(명산동 시장) 근처에 있었던 구암병원. 조종안

서래산 아래는 중동과 경암동의 경계로 빈촌이었다. 아프면 굿을 하거나 점집을 찾던 빈민들이 홍복근의 구암병원 덕에 서양 의술을 이해하고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이후 구암병원은 명산동 유곽시장 근처(지금은 공영주차장)로 이사하여 1982년까지 진료하다 문을 닫았다.

구암교회와 마주하고 있던 '고려제지'(페이퍼코리아) 사택에 살면서 몸이 아플 때마다 회사 통근버스로 진료를 받으러 다녔다는 정창훈(61세)씨는 가끔 옛날 생각이 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고려제지 직원 가족들은 진료비 걱정 없이 아무때나 다녔습니다. 지금의 건강보험증 비슷하게 카드에 체크해두었다가 아버지 월급에서 제했어요. 그래서 조금만 다쳐도 병원에 갔지요. 몸에 빨간 '아까징끼'(머큐로크롬액) 바르는 게 자랑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정씨는 "구암병원은 기와를 얹은 2층 건물이었고, 입원실도 몇 개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고난도 시술이었던 맹장수술을 했을 정도니까 규모가 꽤 컸던 것 같다."면서 "조수가 같은 동네에 사는 나(羅)씨 아저씨여서 단골 환자가 많았는데 이제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며 안타까워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참고 문헌 및 자료발췌
군산 구암교회 기념관
전주예수병원 홍보실,
영명중고등학교 사료
한국기독교사 연구소
군산의료원 김성겸 홍보팀장(사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참고 문헌 및 자료발췌
군산 구암교회 기념관
전주예수병원 홍보실,
영명중고등학교 사료
한국기독교사 연구소
군산의료원 김성겸 홍보팀장(사진)
#군산의료사 #구암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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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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