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병원 2대 원장 ‘패터슨’ 의료선교사(좌)와 간호선교사 케슬러(우).
조종안
다니엘 후임으로 의사 '패터슨'(J. B. Patterson, 손배돈)이 부임하여 병원을 확충하고 입원실을 온돌방으로 건·개축하였다. 특히 진찰을 정확하게 잘하므로 그 의술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여 구암병원은 국내 유명한 병원 중 하나가 되었다. 패터슨이 구암병원에서 근무한 기간은 7년이었다.
1924년에는 의사 '브랜드'(Louis Christian Brand, 부란도)가 내한해 구암병원에서 농촌 순회 진료를 하는 등 기독교 전파에 진력했다. 그러나 브랜드도 6년 후(1930년)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겨갔다.
한국인 의사로는 세브란스의전 출신 강필구(1931년), 홍복근(1937년)이 있었다. 홍복근 아버지 홍원경(45년 작고)도 구암병원 의사였는데, 33세 때 영명학교가 주관한 3·5 만세운동(1919년)에 가담했다. (2001년 2월 28일 새전북신문 참조)
선교사들은 떠났어도 진료는 이어져 기독교 전파사업을 병행하면서 운영되던 구암병원은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의료 선교사들을 체포, 감금하고 강제로 추방하면서 문을 내린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일제는 1940년 11월16일 국내 선교사의 절반에 가까운 160명의 선교사와 자녀 49명을 추방했다. 이후 각지에 있는 선교병원은 한국인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운영권을 이양했는데, 일제는 이 병원들을 계속 감시, 탄압했다. 특히 선교부가 소유한 병원은 '적산'이라 하여 몰수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병원에 신사 설치를 의무화하여 기독교인 의사들이 신앙적 양심을 포기해야 병원사업을 할 수 있었다. 서양 의료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고 병원이 문을 내리자 한국인 의사였던 홍복근은 서래장터 물문다리 옆(중동 서래산 아래) 함석집에 '구암병원' 간판을 걸고 개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