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53)

53. 시한부 삶

등록 2011.03.15 12:07수정 2011.03.1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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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시한부 삶

 

순환 채우고 보태지며 영원히 맴도는 삶,  잠시의 따스함이 차가움을 녹이는 영원한 중독
순환채우고 보태지며 영원히 맴도는 삶, 잠시의 따스함이 차가움을 녹이는 영원한 중독일러스트 - 조을영
▲ 순환 채우고 보태지며 영원히 맴도는 삶, 잠시의 따스함이 차가움을 녹이는 영원한 중독 ⓒ 일러스트 - 조을영

"우리 이러다가 영원히 열망 사냥꾼의 입 속에 갇혀버리는 것 아닐까? 그러기 전에 이 안에서 뭔가 힌트라도 나와야 할텐데."

내 말에 조제도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서는 일기장을 건너다 보았다. 그 틈에 인형웨이터는 구석에 찌그러지는 형상이 됐다.

 

"힉, 넌 왜 자꾸 나를 못살게 굴어엉? 이 냄새나는 초록 머리야!"

인형웨이터가 조제의 머리카락을 확 당기며 짜증을 내자 조제는 눈도 떼지 않고 고함을 질렀다.

 

"시끄러워요!"

 

1999년 8월00일

한밤의 기차소리는 언제 들어도 애틋하다. 오늘은 종일 공부하고 저녁때 잠깐 틈을 내서 탱고 파티에 다녀왔다. 그리곤 집에 와서 간이 침대에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일어나 보니 시간은 벌써 한밤중이 돼 버렸다.

 

내가 파티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몹시 지친 얼굴로 서재에서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그리곤 자신의 왼쪽 팔뚝의 상처를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내가 다가서자 눈을 들어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열어 둔 창 밖에선 바닷바람이 비릿한 내음을 몰고 왔고 불도 켜지 않은 방안엔 그 어디로도 뻗어가지 못한 담배 연기 한 줄기만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애달픈 몸짓은 방향도 모른 채 잠깐 휘돌다가 마지막 한 방울의 한숨 후에 겨우 출구를 찾은 하얀 새 처럼 밖으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그는 다음 주 부터 쇼핑플라자에 출근한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곤 자신의 무릎에다 나를 앉히곤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무엇이 고민이냐고 물었다. 가까이 다가선 입에선 독한 담배 냄새가 훅하고 끼쳤다. 나는 이렇다할 말을 찾지 못해서 굳게 입을 다물고 얼결에 주먹을 꽉 진 채로 방바닥만 내려다 보았다.

 

오늘은 제법 좋은 향수를 그 스타일리스트가 가져 온 것 같았다. 그의 옷깃에선 시원한 풀잎 냄새가 묻어났다. 어떻거나 그는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는 중이다. 앞으로는 그간의 직업과 상관없는 일을 할게 분명하지만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고 가볍게 내뱉으며 그는 다시 한번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열어 둔 창문으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박제된 동물상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오래 앉아서 몇 분인가를 보냈다.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벽 하나를 건너 옆집 남녀의 일상을 우리가 들여다볼순 없듯이 서로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서 옆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잦아졌다. 얼마 전부턴 관계중에도 심한 욕설과 몸싸움을 벌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한창 달뜬 숨을 몰아쉬고 서로가 격렬한 신음소리를 내다가도 불현듯이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지옥에나 어울릴 것 같은 남자의 지독한 욕설이 이어지고 곧이어 쿵쾅거리며 물건을 집어던지는 소리, 이리저리 치고 밀고 패대기치는 소리, 여자도 질세라 울먹거리며 반항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언제나 새벽 한 두 시 쯤에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그 다음날에도 또다시 상황은 반복된다. 심지어는 하루에도 연속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여자의 넘어갈 듯한 신음 소리가 절정에 다다를 쯤 기다렸다는 듯 번개와 같은 쿵쾅거림, 무시무시한 욕설과 폭언, 그리고 한참의 분풀이 후에 남자가 부드러운 말로 사과하며 여자를 달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한동안의 훌쩍거림 후에 여자도 이내 잠잠해진다. 그리고 다시 관계를 시작하는지 좀 전 보다 더욱 자지러지는 둘의 신음소리가 이어진다. 음탕한 기운으로 가득찬 구석 화장실에나 써있을 것 같은 지독히 추잡하고 거친 말도 서슴지 않고 내뿜으며 이제 그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절정에 다다른 때쯤 또다시 남자의 난동이 이어진다.

 

물론 그들이 새디스트나 매조키스트는 절대 아니란 확신도 있다. 그건 진짜 싸움이고 서로가 어떤 오해와 불신이 원인이 되어 빚어지는 상황이란 걸 나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더구나 둘다 한창 달아오른 몸뚱아리일때 어느 하나가 그 환상에서 깨어나서, 상대를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열심히 현재에 충실하고 있는 다른 하나에게 수치감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정확히 남자 쪽에서 시작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이어폰을 끼고 그들의 소음을 피해야 하는 이유 역시 전과는 달라졌다. 그 전엔 그들이 행위 중에 내뱉는 진한 음담패설과 신음소리가 싫어서였고, 이제는 서로 헐뜯고 호통치며 자신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그 오만함이 싫어서다. 서로 사랑해서 내뱉는 소음과 서로 미워해서 내뱉는 소음, 이 둘 모두다가 제 3자에겐 고통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사랑도 미움도 모두 남에게 폐나 끼치는 가치없는 일이란 말인가?

 

오늘 탱고 파티에서 그 시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사랑과 미움은 어찌 보면 공통으로 연결된 것이라고. 사랑하기에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사랑하기에 죽고 죽이기도 하는 거라고. 그렇게 보면 사랑이란 건 세상을 아름답게도 만들지만 참으로 추하게도 만드는 것인지 모른다.

 

사랑을 나누는 동안에는 서로가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리고 싸움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자신의 현재에 충실하느라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일부러 더한 교태를 부리며 자신들의 시간에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는 일순간 무슨 이유론가 화가 끓어올라 사랑을 미움으로 변화시키고 만것이다. 그 감정의 연결 지점이란 것은 없다. 벌거벗은 채로 몸을 부대끼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 부대낌의 방식이 달라졌다는 차이일 뿐. 그리고 그건 미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사랑과는 정 반대에 위치한 감정이라고 이름지어진다. 하지만 그 시인은 사랑과 미움은 같은 말이라고 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도 그런 것 같다. 현재의 것만 보고 현재만을 사랑하기에 앞으로의 일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열심히 현재를 살아도 어느 순간엔 생각지도 못한 그 무엇이 달겨들어 지금을 가치없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을 멈출 수도 없다. 아마도 옆집 여자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남자에 대한 믿음이나 서로의 사랑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지 않기에 곧 당하리란 걸 알면서도 미련하게 '그 순간'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절정의 순간을 그 남자에 의해 뺏기고 마는데도 끝없이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조금은 애처롭고 눈물나는 도전이다.

 

인간의 삶도 그런 것일까? 하루 하루 산다는 것은 결국엔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는 여정이고, 우리 모두는 길든 짧든 각자가 태어난 시간에 비례해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사람 수명을 80세 정도로 보았을 때, 갓 태어난 아기는 80년 이란 시한부 선고를 받는 셈이고, 백발의 노인은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생의 마지막 날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 모두는 살아가는 동안에는 이룰 수 있건 없건 넘치는 꿈을 꾸고 그 꿈에 기대어 생에 대한 힘을 내보기도 한다. 결국은 죽음을 향해서 발걸음을 내딛는 인생이지만 있는 힘을 다 짜내어 자꾸만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다.

 

나는 몇 달 전 삶의 행로가 일순간에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 그놈들에 대한 기억은 수십가지로 이미지화되어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혔고 그건 파장처럼 크게 원을 그리며 일순간에 나를 끌어들이고 집어삼켜버리기도 했다.

 

호젓한 길이 하나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전수칙을 지키며 그 길 위에서 운전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웬 놈들이 떼거리로 내 차 앞으로 돌진하며 막아선다. 그리곤 그 어떤 이유도 없이 차와 함께 나를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버리곤 뺑소니를 쳐 버린다. 굴러떨어지는 차 속에서 나는 피를 흘리며 절규를 한다. 놈들은 이 일을 묵언하자고 저희들끼리 합일하고 시침을 뚝 떼고 평상시 대로 그 대로를 종횡무진한다. 나는 엉망진창 상처투성이가 되어 아무도 없는 낭떠러지 아래에서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고 갖은 애를 쓰며 절규한다. 하지만 처박힌 차의 손잡이는 이미 고장이 나버렸기에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가 않는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하면 나는 차와 함께 영원히 저 세상으로 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러자 없던 힘이 솟아서 맨손으로 차창을 부수고 힘겹게 밖으로 나온다.

 

지난 몇 달간을 나는 그 지독한 악몽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리고 그 놈들을 용서하지는 못한다고 다시 되뇌어 본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구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그저 포기하고 사는 것이고, 언제까지 그 생각에 매여 있으면 내 삶은 엉망으로 치닫을 것이기에 당분간은 잊고 사는 것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다독여 본다. 하지만 그 상처가 썩어들어가고 어느 순간에 터져버릴진 알수가 없다. 그리고 옆집 여자도 나와 같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고 여겨지자 불현듯 동질감이 스며들었다.

 

 

 

<계속>

2011.03.15 12:07ⓒ 2011 OhmyNews
#중간 문학 #판타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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