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짝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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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짝패>는 조선 제25대 철종의 즉위(1849년)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재 이 드라마는 철종에서 고종으로 가는 시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드라마 속에서는 조선왕조의 말기적 징후가 종종 노출되고 있다.
공권력(드라마 속의 '현감')이 제멋대로 세금을 부과하는 장면, 대중 사이에서 홍길동 같은 인물('아래')에 대한 동경심이 번지는 장면, 새로운 체제를 지향하는 운동조직('동학')이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장면, "살기 힘들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터져 나오는 장면, 반정부 소요사태에 자극받은 대중이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민란에 동조하는 장면. 이 드라마에 나오는, 왕국의 멸망을 예고하는 불온한 기운들이다.
그런데 철종 이전에 이미 조선왕조의 쇠락 징후를 간파한 쪽이 있었다. 바로 일본의 막부정권이었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바쿠후'라고 하는 막부는 일종의 군사정권이다. 12세기부터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까지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것은 막부정권들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인 1603년에 등장한 도쿠가와막부(에도막부)는 조선왕국의 운명을 예의 주시했고, 그 결과 그들은 남들보다 먼저 왕국의 쇠락 징후를 간파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일본에 가장 중요한 지역은 한반도였다. 바닷길이 활성화된 16세기 이전에 일본이 세계무역에 참여하자면 기본적으로 한반도를 매개로 대륙과 교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대표상품인 비단은 한반도를 통해 일본열도에 전해졌고, 일본의 대표상품인 은은 한반도를 통해 중국대륙에 전해졌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비위를 맞추고 조선을 최고의 '전략적 동반자'로 대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7세기, 일본이 국교 체결한 곳은 조선·오키나와뿐일본의 '조선 중시 외교'는 바닷길이 활성화된 이후는 물론이요, 임진왜란(1592~1599년)이 종결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지됐다. 17세기 이후에도 일본이 한반도를 가장 중시했다는 점은 이 시기 일본이 국교를 체결한 나라가 조선과 오키나와뿐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같은 시기 일본은 청나라·네덜란드와는 통상관계만 유지했을 뿐 외교관계는 맺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극진히 환대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통신사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교체될 때마다 일본을 방문하여 양국의 친선 증진에 기여했다. 통신사 행렬은 대마도를 거쳐 에도(동경)까지 가는 동안 일본 백성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이것은 일본에 엄청난 재정 부담이었다. 통신사가 지나가는 각 지역에서는 환영 비용을 분담해야 했다. 최종 목적지인 에도에 당도하면, 막부는 빙례(聘禮)라는 거대한 예물교환의식을 열어주어야 했다. 옥스퍼드대학 제임스 루이스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통신사가 한번 방문할 때마다 일본에서는 연간 쌀 수확량의 12% 정도를 소모했다.
조선통신사의 에도 방문은 조선·일본의 친선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신(新)막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의미했으므로, 막부정권은 재정 부담에도 통신사를 기꺼이 에도까지 초청했다. 그만큼 조선이 일본에 중요했던 것이다.
일본의 '조선 짝사랑'은 왜 시들해졌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