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새한 할머니가 주신 공작새
최성규
나로도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한방진료실로 많은 발걸음이 이어졌다. 새로 온 한의사가 어떤 녀석인지 보려고 그랬던지 복도 대기석은 만원이었다. 일일이 얼굴도 기억하기 힘든 그때, 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지팡이를 짚고 터벅터벅 들어오셨다.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있었다. '고무장갑이나 반찬거리가 들어 있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봉지 안으로 손이 들어가더니 뭔가를 끄집어낸다.
"히야. 엄마. 이게 뭐예요?"깜짝 놀란 한방 간호사 선생님이 소리쳤다. 그건 종이로 만든 항아리였다. 약간 두꺼운 종이절편을 한 층 한 층 겹쳐서 만든 항아리는 한눈에 봐도 보기 좋았다. 항아리에는 열고 닫는 뚜껑도 있었는데 알록달록한 색깔이 고명처럼 살포시 입혀져 있었다.
"이거 선물잉게. 하나씩 받고. 이거는 선상님 드릴라네."나에게 다가온 할머니는 커다란 물체를 앞에 들이밀었다. 아, 그것은 종이로 만든 공작새였다. 가녀리게 뻗은 공작의 목과 그 주위를 둘러싼 공작의 날개는 화려하고 우아했다. 정성이 깃든 물건에서는 기운이 느껴진다는데, 이 공작새를 보면서 종이 한 겹마다 서린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좋으면서도 부담됐다.
"이거 너무 부담되는데요. 주셔도 되는 거예요?" 치료 잘해달라는 인사치레치고는 만든 이의 정성이 컸다. 한 번의 사양과 한 번의 권유를 거쳐서 진료실에 공작을 모시게 됐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봉지에서 종이 거북이가 기어나왔다. 그리고 항아리도 출토되었다. 꿈속에서 구지가를 불렀는지 거북이는 운 좋게 의사선생님께 가고, 다른 분들은 항아리를 하나씩 가지게 됐다. 다들 좋아라 하셨다.
"이거 동전 넣어놓으면 좋겠다. 그지?"
내가 받은 공작새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다. 흐뭇하면서도 비교될까 봐 다른 분들께 민망했다. 책상 한쪽에 계속 모셔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저걸 할머니가 만들었을까? 아닌데. 그렇다고 사다가 줄 리도 없는데.'
나중에 간호사 선생님들께 사정을 전해 들었다. 할머니의 아드님은 알코올중독에 걸리셨단다. 재활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정신집중을 위해 종이 만들기를 많이 시킨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공작새와 거북이, 그리고 항아리. 정말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공작의 목은 한층 높아졌겠지. 부들거리는 손을 부여잡고 종잇조각을 덧대는 작업. 삼천 배만큼 고된 손놀림.
며칠이 지났다. 할머니가 다시 오셨다. 이번에는 빈손이었다. 빈손이 한방실, 치과실, 내과실을 한 번씩 휩쓸고 지날 때마다 간호사 선생님들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줬다 다시 뺐는 게 어딨어요?""진짜 다시 갖고 가는 거예요?"항아리와 거북이가 손에 들려 있었다. 다시 갖고 가야 된단다. 종이작품이 비싸다는 걸 들으신 것일까? 아드님이 어머님께 불평을 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만든 건데 다 나눠주냐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겠다. 어쩐지 주실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정작 공작새는 뺏어가지 않았다. 크기도 크려니와 책상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공작새를 말이다. 한방치료를 받았더니 뺏기가 미안하셨나 보다. 이것도 내 생각이겠지만.
2년이 지난 지금도 할머니는 침을 맞는다. 그리고 공작새는 진료실에 없다. 할머님 맘이 바뀔까 봐 그날 바로 2층 관사에 피신시켰기 때문이다. 그대로 놔둬 볼 걸 그랬다. 진정한 속마음을 알 수 있을 텐데.
"공작새는 제가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마음 바뀌면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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