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가 죽었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졌다"

시인 신달자, 등단 47년 맞아 미발표 신작시 76편 모은 시집 <종이> 펴내

등록 2011.04.04 14:07수정 2011.04.0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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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달자 등단 47년을 맞은 시인 신달자가 미발표 신작시를 모은 시집 ‘종이’(민음사)를 펴냈다 ⓒ 시인 신달자

"문자를 대체하는 영상의 시대, 아날로그를 몰아내는 디지털의 시대에 신달자는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든다. 거기에는 시련과 영욕의 세월을 인고해 온 '질긴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이기(利器)로 출발한 종이는 수천 년 동안 인간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인간의 욕망과 희열, 비통을 품은 인간 정신 자체가 되었다.

파피루스, 대나무 조각, 비단, 양피지, 심지어는 인피(人皮)에 이르기까지 기록당하는 매체는 다양했다. '그래서 그러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종이를 만들어 냈다'(페이퍼 로드). 얇게 펴진 한 장의 종이에는 쓰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이 총집결되어 있다. 영혼의 길이라 할 만한 페이퍼 로드 위를 걸으며 우리는 '인류 최고 문물의 고고학자가 된다." - 시인 장석남


등단 47년을 맞은 시인 신달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아날로그 세대라 할 수 있다. 그가 미발표 신작시를 모은 시집 <종이>(민음사)를 펴낸 것도 어쩌면 아날로그를 꿈꾸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종이는 곧 인간의 정신입니다"라고 쐐기를 박는 신달자는 "7년 전부터 이 시집을 마음에 품었다"고 귀띔한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종이의 죽음은 곧 인간의 소중한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고, 그 안타까움은 펜을 움직였다"라며 "썼다가 지우고, 넣다가 빼기를 거듭하며 7년, 바로 지금이 종이를 이야기할 때라는 확신으로 마침내 그간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시 76편을 거두었다"고 자랑스럽게 적는다.

시인 신달자가 이번에 펴낸 시집 <종이>에는 종이가 걸어온 길(페이퍼 로드)부터 삶과 글이 하나였던 보르헤스 삶(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까지, 시 한 편 한 편에 정을 듬뿍 주고 받은 종이 이야기로 거듭난다. 자연에 있는 모든 것에서 종이를 노래하는 신달자. 그는 날이갈수록 파괴되는 자연환경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라져 가는 감성에 대한 슬픔을 쓴다.

신달자는 "다만 이 시집은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그리워하고 그 본성을 되찾아 보려는 한 톨의 씨앗"이라고 속삭인다. 시인은 "모든 것이 '빨리빨리'로 달려가는 빨라지기만 하는 시대, 맨눈이 아니라 스크린으로 세상을 보는 이 시대는 종이가 필요하다. 인간의 향기가 필요하다"고 되짚는다.

"'종이가 죽었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졌다"


"종이 시집을 내보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그런데 종이가 사라진다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종이가 죽었다는 말도 나왔다. 마음이 급해졌다. 문명은 나를 편안하게 했지만 그만큼 정신은 삭막해졌다.

나는 인간의 선한 본성, 그 아름다움에 종이라는 사물을 대면시켜 보고 싶었다. 따뜻함, 영원함, 영성적 노동, 가득함, 화합, 평화, 사랑, 모성, 순수, 고향, 우직함, 이런 충돌 없이 잘 섞이는 감정의 물질들을 하나의 원소로 종합한 것을 '종이'로 표현하고 싶었다."
- '시인의 말' 몇 토막

서시, 종소리, 종이 이불, 백지1, 진초록 종이, 한지, 바람의 시, 남자 먹는 여자, 해초 종이, 원고지 납골당, 칼을 베고 잠들더라도 등 모두 76편이 실려 있는 이 시집에서 모든 사물은 종이로 통한다. 여름 나뭇잎은 바탕이 너무 진해서 붓을 밀어내는 진초록 종이다(진초록 종이). 파도는 마구잡이로 구겨 놓아도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푸른 종이다(파도). 가을 들은 바람도 다소곳하게 지나는 고요한 종이다(가을 들). 폭설은 지상에 있는 검은 종이를 덮어버리는 하얀 순은을 띤 종이다(폭설).

너무 바빠, 시간이 없어, 말을 줄여 글로는 왜 써!
그 안에는 마법의 바람 부나
그 안에는 인간의 심장을 뇌를
영원한 본질을 갉아먹는 이빨이 사나
쓰러지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정신
119를 불러라 - '119를 불러라' 몇 토막

기계만능, 시장만능사회는 겉으로는 빤질빤질하고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막힘이 없이 보이지만 그 속내에는 심장이 내는 고동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그야말로 죽은 세계다. 새로운 생명이 움트지 못하는 이 죽은 세계로 보내는 시인 신달자 목소리는 채찍질이다. 시인은 죽은 세계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아날로그가 지닌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적는다.

비밀번호도, 지문도, 목소리도 아닌 "밤낮 열어 두는 / (중략) 정 깊은 사립문"(아날로그)에서 살갗과 살갗이 맞닿는 직접체험은 우리 마음 깊숙이 버려진 감성을 일깨운다. 그 감성과 상상력이 '생의 씨알'이요,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며 '철 모르게' 히히덕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뿌리이자 주춧돌이다.

시인이 이토록 간절하게 품고 있는 아날로그는 종이에 그대로 옮겨진다. "찢기기도 하는 닳기도 하는 퇴색하기도 하는 문자가 흐해지기도 하는 / 만져지기도 하는 소중하여 한 번 더 읽으려고 귀를 접기도 하는 / 졸다가 가슴에 얹기도 하는 두어 권 베개로 귀로 읽기도 하는 그 편안한 / 본성"(종이책)이다.

인생은 글이 적혀 있는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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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종이' 이 시집에서 모든 사물은 종이로 통한다 ⓒ 민음사

누가

내게

쉬익
뺨을 갈렸다
연타의
굴욕이 쩡 하늘을 가르며 빛났다
벌겋게 달아오른
팽팽한 우주 표면에 윙 울리며 부어오르는 심장을
직격탄으로 다시 갈겼다

종이가 두 팔로
내 생의 붉은 자국들을 두루두루 다 받아 안았다. - '뺨' 모두

문학평론가 김인환은 "인생은 글이 적혀 있는 종이다. 사람들은 그 종이에 글을 쓰고 짓고 다시 쓴다"라며 "신달자는 더 나아가서 세상을 커다란 도서관이라고 생각하고 자연을 커다란 종이라고 생각한다. 갯벌, 갈대, 습지, 흑두루미, 큰고니, 노랑부리저어새, 검은머리갈매기? 이 모든 것들이 시인이 읽어야 할 글자들"이라고 평했다.

시인 신달자는 1943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1964년 '여상여류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결혼을 한 뒤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봉헌문자> <아버지의 빛> <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 <오래 말하는 사이>가 있으며,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수필집 <백치애인>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 <고백>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시와시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 받음.
#시인 신달자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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