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허점을 비집으며 우리를 비웃는다

[연재소설] 미래는 남은자들의 유서이다(25)

등록 2011.04.19 08:43수정 2011.04.19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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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남동생을 프랑스로 보내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이브라힘모스크 학살사건 때문이었다. 자칫했으면 아메드를 잃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사건은 아빠가 돌아가신 다음 해 2월에 발생했다. 갈릴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바루크 골드스타인 등이 이브라힘모스크에 난입해서 새벽예배 중이던 무슬림들을 무차별 학살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예비군 소령이자 의사였던 그는, 점령지 내의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이거나 추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무장테러조직의 핵심간부였다.


10여분 동안 9백 발이 넘는 총알이 발사되었고, 수류탄도 폭발되었다. 결국 58명이 살해되었고, 2백여 명이 총상을 입었다. 학살은, 총탄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집기들을 방패삼아 달려든 피해자들에 의해, 그가 타살된 후에야 끝났다.

그렇지만 현장에 있던 아메드의 친구 한 명은 총알이 가슴과 복부를 관통하여 그 자리에서 절명했고, 다른 친구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출혈과다로 사망했다. 아이들 인솔교사는 척추에 총알이 박혀 하반신불구가 되었다. 다른 네 명의 학생들도 총상 등을 입고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엄마는, 아메드가 무사했던 게 아빠의 영혼이 지켜주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가엾은 아메드. 그때 우리 모두는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던지. 그렇지만 친구들 장례식에서 돌아온 아이의 고통스러운 몸부림과 절규는 우리를 또 얼마나 비통하게 했던가.

예정대로라면 아메드도 친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 라마단 기간의 성지순례였다. 학교수업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던 엄마도 순례에 동의했고, 직접 배낭까지 꾸려 주었다.


-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해.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 

이틀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힐 만큼 엄마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아메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일 날 아침이었다. 갑자기 엄마가 배가 아프다며, 집을 나서려는 아이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왼발을 빼면 오른발을 잡았고, 양발을 빼면 허리를 잡고 늘어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잘 갔다 오라고 축원까지 했던 엄마였다. 일단 동생을 보낸 후 병원에 가자고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반드시 아메드가 직접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우겼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간혹 심한 히스테리증세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날 아침은 정말 대단했다.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그것이 아이를 살렸지만 말이다.

하루 종일 입이 한 주먹이나 나왔던 아메드는 밤이 되어서야 풀어졌다. 그렇지만 다음날 아침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아이는 식음을 전폐하며 울었고, 저주와 분노로 한동안 잠조차 이루지 못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브라힘모스크를 관리하던 이스라엘 군의 태도였다. 그들은 총소리가 나자마자 모두 자리를 피했다.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학살자들을 절대 제지하지 말라고, 사전에 지시받았다고 했다.

오히려 군인들은, 학살현장에서 탈출하는 주민들을 향해 난동자라며 총알을 난사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했다.

엄마가 큰 외삼촌에게 전화한 것은 그 직후였다. 어학실력만 갖추어지면 데려가겠다고 다짐을 받은 후로, 하루 스물 네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꿈조차 프랑스어로 꾸도록 다잡는 것이 엄마 몫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피나의 몫이었다.

엄마가 아빠를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살을 저미고 뼈를 자르며 모든 감각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엄마가 그 고통만 잊을 수 있다면 된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처음에는 1년이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외삼촌으로부터 대학입학자격시험을 통과할 실력까지 갖추라고 연락 받은 후 다시 1년이 더 추가되었다.

행복했던가? 최소한 불행하다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정확했다.

팔레스타인의 과거와 미래를 넘겨주고 담요 한 장 덮고 잘 크기의 땅을 받는 대가로, 아라파트가 라빈과 페레스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도, 나블루스에 자치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엄마는 이곳 사람이 아니었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아메드가 불어단어 몇 개 외웠느냐 뿐이었다.

'위대한 이스라엘 땅을 아랍 놈들 입에 담게 했다'고, 혹독한 통치자 라빈이 광신적 유대교도 이갈 아미르에게 피살되었을 때도 엄마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제 몇 달만 더 버티면 아들은 프랑스에 가 있을 것이다. 그 후 이곳이 생지옥으로 변한다 한들, 감당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불행은 예측하지 못한 허점을 비집고 들어와 우리를 비웃는다.

어째서 우리는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면서도 신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3월에는 프랑스에 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4월이 지나도록 초청장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무리 9월부터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다 해도 지금쯤 결정이 났어야 했다.

점령지 상황은 엄마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라빈의 뒤를 이은 노벨평화상 수상자 시몬 페레스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비열한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선거 판세가 불리해지자, 헤즈볼라의 박격포 공격을 빌미삼아 남부 레바논을 침공했다. 골드스타인과 같은 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상을 다시 빼앗고 싶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그건 주었다가 뺏는 사탕막대가 아니었다. 줄 사람과 주면 안 될 놈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판단력을 자책하는 것이, 부끄러움을 줄이는 일일 터였다.

다시 무자비한 살인의 계절이 도래했다. 일주일 동안 수십 대의 전폭기들이 남부 레바논지역에 출격하여 융단 폭격했고, 수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남 레바논 주민들은 샤브라-샤틸라학살사건*의 기억을 떠올리며, 가재도구들을 남겨둔 채 황급히 피신했다. 50여만 명의 피난민들이 베이루트로 몰려들었다. 결국 카나마을*에서 1백 여 명의 피난민들을 대량학살 한 후에야 살인기계들은 작동을 멈추었다.

골드스타인의 친구들은 페레스의 알랑 방구를 귀여워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학살자들은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일단 총부터 쏘고 대화하자"는 리쿠드당이, 그나마 주었던 자치마저 빼앗겠다는 공약으로 승리했던 것이다.

리쿠드당은 유대인불법정착민들의 무조건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헤브론학살사건의 경우처럼, 정착민들은 군인들보다 종종 더 위험하게 행동했다. 국제여론에 밀려 극우테러조직 두 곳은 불법화되었지만, 그 뿐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학살사건이 터졌을 때는 필요한 조치를 모두 취할 것처럼 난리를 쳤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것을 외면했다. 골드스타인을 도와 학살에 가담한 인물들이 더 있었음에도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렸고, 그가 총을 다 쏠 때까지 그냥 놔두라고 불법 명령했던 지휘계통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

엄마의 초조함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다급해진 엄마가 두 번이나 날카로운 목소리로 오빠와 통화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말은 늘 부탁으로 끝맺었다. 밤잠도 자지 않고 쿠란을 암송했고, 바깥에서 소란이라도 벌어지면 아메드부터 곁에 붙잡아두었다. 저러다가 어떻게 외국에 보낼까 싶었지만 그런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6월 초 외삼촌 전화를 받았을 때, 엄마의 기쁨이란! 하루 종일 열에 들떠 집안을 뛰어다녔고, 준비물을 적은 종이만 세장을 넘겼다.

엄마는 아메드의 유학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병원 건물을 처분했다. 아빠가 남겨준 유일한 유산이자 생계 터전이었다. 그동안 거기서 나온 월세로 식구들이 생활했는데, 이제부터는 다른 수입원을 마련해야 했다. In sha'allah!

산 입에 거미줄 치겠니? 엄마에게 나머지는 신의 영역이었다.

남동생이 프랑스로 떠나기 일주일 전이었다. 아메드는, 이브라힘모스크에서 살아남은 친구들과 함께, 희생된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집을 나섰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여행에서, 마지막 우정을 나누는 것조차 말릴 수 없었다.

- 바로 돌아와야 해. 짐을 확인해야 하니까. 
- 알았어요, 엄마. 전화 할 게요.

그날따라 해가 길었던 것 같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지만 긴장했던 때문이리라. 돌아올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리면 바로 전화하겠다고 했는데, 연락이 없었다. 초조함에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지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아이들의 무덤이 아빠가 묻힌 곳과 다른 장소일 수 있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못했다.

오후 5시를 넘기자 사피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일은 그녀 몫이었다.

- 나도 가마. 
- 그 사이에라도 아메드가 오면 어쩌려고? 

반나절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된 엄마를 눌러 앉힌 사피나는, 서둘러 한 블록 떨어진 이모 집으로 달려갔다. 사촌동생들까지 동원하면 일이 좀 더 쉽지 않을까 싶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친구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사피나는 발을 뗄 기운조차 없었다.

아이들이 네 명이나 실종되었는데도 통행금지는 밤 8시에 어김없이 시행되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실종자가족들은 통금 해제와 동시에 총알처럼 공동묘지로 달려갔다. 아이들의 무덤은 아빠가 묻힌 그곳보다 훨씬 외곽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불행이 희망의 덧없음을 한껏 비웃고 분탕질을 쳤음에도, 우리는 멱살잡이조차 하지 못했다.

총탄이 오른쪽 허벅지와 발목을 관통해 불구가 된 아이의 목발은 묘지입구에서 발견되었다. 모두들 정신없이 묘지로 달려갔다. 수백 개의 무덤에서 아직도 싱싱한 백합꽃과 수선화 꽃다발이 놓인 묘를 찾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직사각형 입방체 아래 누워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자(死者)들 위로, 절망의 통곡이 메아리쳤다. 그렇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1) 이브라힘(히브리어로는 아브라함)의 무덤인 막벨라동굴 위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 헤브론에 있다.

2) 1982년 레바논 침공 당시였다. 이스라엘에 의해 조직되고 지원을 받는 레바논 기독교민병대가 샤브라와 샤틸라 팔레스타인난민촌에 들어가 이틀간에 걸쳐 2천여 명의 마을주민들을 학살했다.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난민촌 외곽에서는 이스라엘 군대가 진을 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그 후 국제적 비난이 가열되자 도마뱀 꼬리 샤론이 국방장관 직에서 사임했다.

3)  헤즈볼라 암살전문 비밀특수부대 에고즈의 노출을 막기 위해, 유엔평화유지군 캠프에 피신해있던 1백 여 명의 난민들을 학살한 사건. 민간인 복장으로 캠프에 잠입한 특수부대원들은 암살을 획책하다 발각되자, 포격을 요청하며 철수했다. 1백여 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치명상을 입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게릴라 진지를 포격하는 과정에서의 우발적 실수라고 강변했고, 군부는 포격용 지도가 오래되어서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평화유지군에 의해 촬영된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됨에 따라 거짓말이었음이 들통 났다. 폭격 직전 캠프 상공에 이스라엘 무인정찰기가 떠 있는 것이 찍혔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인티파다 #학살사건 #광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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