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의 다른 글 낙태 공화국 대한민국오늘은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겠다. 입에 담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만 할 숙제를 말하고자 한다. 낙태다. 이 뜻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노파심에 그 뜻을 이야기해 보자. 낙태란 자연분만기 이전에 태아를 자궁에서 인공적으로 제거하는 행위를 말한다.낙태는 법률상 명백히 범죄행위다. 우리 형법은 낙태를 한 여성도, 이를 도와준 사람(의사)도 모두 처벌한다. 그중에서도 낙태를 시술한 의사에 대한 법정형은 징역형만 있고 벌금형도 없으니 의사가 낙태를 하다가 걸리면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해야 한다. 다만 우리 법은 예외를 인정한다. 그것이 모자보건법이라는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몇 가지 사유(임신이 강간에 의한 경우, 임신 지속이 산모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등)가 있으면 인공임신중절이라는 이름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대한민국은 낙태공화국이 된 지 오래다. 민주공화국은 좋지만 정말로 만들지 않아도 좋을 공화국 하나를 더 만들고 말았다. 그만큼 낙태가 광범위하게,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말이다. 낙태 건수 중 90% 이상은 불법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낙태가,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모자보건법이 인정하는 편법낙태(인공임신중절)라는 이름으로도 정당화시킬 수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범죄행위이다. a ▲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불법 낙태 시술 관련 산부인과 세 곳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하면서 낙태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었다. 사진은 SBS 드라마 <산부인과>. ⓒ SBS ▲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불법 낙태 시술 관련 산부인과 세 곳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하면서 낙태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었다. 사진은 SBS 드라마 <산부인과>. ⓒ SBS 낙태가 전국적으로 정확히 어느 정도로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확한 통계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단지 추정할 뿐이다. 2005년 보건복지부가 실태조사를 통해 추정한 건수는 연간 34만 건 정도였다. 하지만 낙태전문가들은 이 수치를 믿지 않는다. 일부 전문가들은 연간 150만 건 이상의 낙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연간 신생아 수가 40만 명 남짓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이 갈 것이다.대한민국에서의 낙태는 법률상 범죄인 것이 분명하나 사실상 처벌되지 않는 이상한 범죄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낙태를 하다 보니 사법당국도 손을 놓고 만 것이다. 낙태는 이미 사실상 사문화된 범죄 유형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가끔 이 낙태죄가 수면 위에 오르는 때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무분별한 낙태가 사람들의 양심을 흔들기 때문이리라. 이런 눈으로 보면 최근 낙태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도처에서 일어나는 낙태라는 사회현상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이다. 의사들 사이에서는 '프로 라이프 의사회'라는 단체가 나타나 그동안의 무분별한 낙태현실을 고발하고 낙태를 하는 의사들을 색출하여 고발하는 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그런데 '프로 라이프'가 있다면 사회 일각에서는 '프로 초이스'도 존재한다. 이것은 낙태는 본질적으로 여성의 생식에 관한 자기 결정권의 문제라고 하면서 낙태를 무조건 금지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한다. 이렇게 되다 보니 우리 사회도 낙태를 둘러싸고 큰 전선이 만들어진 느낌이다. 마치 미국에서 지난 반세기 이상 동안 진행되어 온 찬반 논쟁을 한국에서 보는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오늘 낙태의 본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은 낙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낙태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낙태 문제는 생명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오늘 나와 함께 생명을 논해보자.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인 낙태라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 보자. 로널드 드워킨과 <생명의 지배영역> 오늘 나는 낙태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 시대의 저명한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을 소개한다. 드워킨은 임마뉴엘 칸트 이후 영문으로 된 법률문헌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법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람의 법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책들이 국내에서도 몇 권 번역되었지만 일반 독자가 읽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명색이 법대 교수이고, 그의 책 대부분이 나의 전공과 유관함에도, 나는 드워킨의 책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읽기는 시도했지만 이해에 성공한 적이 없다. ▲ 로널드 드워킨의 <생명의 지배영역 : 낙태, 안락사, 그리고 개인의 자유>(원제 Life`s Dominion - An Argument About Abortion, Euthanasia, and Individual Freedom) ⓒ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 로널드 드워킨의 <생명의 지배영역 : 낙태, 안락사, 그리고 개인의 자유>(원제 Life`s Dominion - An Argument About Abortion, Euthanasia, and Individual Freedom) ⓒ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그러다가 2년 전 내가 담당하는 인권법 수업을 위해 열일 제치고 <생명의 지배영역, Life's Dominion>(박경신·김지미 옮김, 이화여대 생명의료법연구소 발간)을 읽게 되었다. 읽어 내려가는 순간 이 책이 종래의 번역서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래의 책이 드워킨의 법철학의 내용을 보여주는 순수한 이론서임에 반해 이 책은 그의 법철학을 현실에 응용한 실용 철학서였다. 낙태와 안락사라는 사회적 문제의 본질을 번득이는 법철학적 논리로 정리해 나가는 것이 여간 신선해 보이질 않았다. 번역의 수준 또한 가독성을 높이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드디어 나는 드워킨을 제대로 만난 것이다. 왜 그가 세계적 철학자로 그토록 대접받고 있는지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다. <생명의 지배영역>은 낙태와 안락사를 법철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책이다. 비록 전문 학술서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철학자만을 위한 책이 아닌 것처럼 이 책은 소수의 전공자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칸트의 철학서에 비하면 읽기가 훨씬 수월하다. 이글이 드워킨을 통해 생명의 본질을 성찰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해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다만, 지면의 한계로 드워킨이 다룬 두 가지 문제(낙태와 안락사) 중 오늘의 주제인 낙태에 한정해 소개하고자 한다. ▲ 로널드 드워킨. ⓒ David Shankbone ▲ 로널드 드워킨. ⓒ David Shankb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