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27회)

궤보요 <3>

등록 2011.04.22 10:21수정 2011.04.2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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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모습을 볼 때, 두 손과 두 다린 앞을 향한 채이고 입은 다물고 눈은 뜬 상태였다. 양손은 주먹 쥐었으며 복부는 두드리면 소리가 났다. 발바닥은 쪼글쪼글 주름이 잡혀 허연 상태인데다, 손톱과 발톱 틈, 신발 안에 진흙이 있고 입과 코 안에도 물거품과 맑은 핏자국과 긁힌 흔적이 있었다.

'이로 볼 때, 이 여인은 살았을 때 물에 빠진 게 분명하다. 장안을 돌아다니는 방물장수 아낙이 적지 않은 박초시의 어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분명 심상치 않은 일에 끼어들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불자(拂子)로 왼손 바닥을 가만히 내려치며 흩어진 생각을 바로잡았다. 여인의 주검을 관아로 옮긴 후 박초시 주변을 살펴나간 것이다.

박초시, 아니 박상범(朴相範)은 중인(中人) 신분으로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곰보 자국이 흉했다. 죙일 방안에 들어박혀 이런 저런 서책을 읽거나 이룰 수 없는 꿈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날밤을 세우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그의 아비는 장삿길에 일찍 눈을 떠 적지 않은 재물을 모은 고로 그런대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라는 인문지리서의 서론이랄 수 있는 사민총론(四民總論)에서 우리나라 백성을 넷으로 나누었다.

<옛날에는 사대부가가 따로 없었고 모두 백성(民)이었다. 백성에는 넷이 있는데 선비가 어질고 덕이 있으면 임금이 벼슬을 시켰고, 벼슬 하지 못한 자는 농사를 짓거나 장인(匠人)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었다.>

다시 말해 이중환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부류를 신분이 아닌 직업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벼슬하지 못한 선비는 농공상(農工商) 가운데 하나를 택해 살아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대부라 하여 농공상(農工商)을 업신여기거나 농공상이 되었다 하여 사대부를 부러워한다면 이는 근본을 모르는 것이다."

이중환이 말한 중인은 서얼과 장교, 역관, 산원, 의관 등의 전문직업인이다. 양반이라 하여도 몇 대에 걸쳐 벼슬하지 못하면 개백정이 된 경우가 있었는데, 개백정은 천민이었지만 한시를 지을 줄 알아 위항인으로 대우받았다.


정조는 중인과 시정배(市政輩)를 구분했는데 요즘으로 말해 장교, 공인회계사, 의사, 외교관, 통역사, 천문학자, 공무원, 화가, 서예가, 법관, 변호사 등이다. 이러한 중인 외에 시정(市政)과  하천(下賤)을 아울러 당시엔 위항인이라 하였는데 이들은 사대부와 상민 사이의 중간계층이었다.

위항인은 글자 그대로 위항(委巷)에 사는 사람이다. 위(委)는 곡(曲)이고 항(巷)은 이중도(里中道)라 했다. 다시 말해 위항은 '마을 한가운데 꼬불꼬불한 작은 길'이고 거기엔 작은 집이 많이 모여있다. 이러한 동네엔 누가 사는지도 분명치 않지만 조선 후기로 내려와 양반보다 부유한 중인이 많았다는 점이다.

박상범은 장사 수완이 남달라 아비의 뒤를 이어 대비전 일을 하면서 남다른 공을 쌓았지만 얼굴에 마마 자국이 흉해 '초시' 하나만 얻어 단 채 물러나왔다. 그동안 모은 재물이 적지 않을 거란 소문에 혼처가 밀려들었으나 첫 부인을 상처하고 쉰이 넘은 지금까지 독수공방해 오고 있었다.

한데, 조사하는 과정에서 깜짝 놀랄 사실이 드러났다. 그것은 중양절이 지나 박초시가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다. 알게 모르게 떠다닌 소문엔 방물장수 아낙과 역관의 아내 안동 권씨가 깊숙이 끼어들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일에 급히 서과가 투입되었다.

"너는 역관의 아내 안동 권씨를 만나 자초지종을 알아보거라. 나는 관악산에 묻힌 박초시의 주검을 살필 것이다."
"예에, 나으리."

정약용은 곧 관악에 묻힌 박초시의 봉분을 헐어냈다. 자손이 없는 그였지만 무덤은 여느 무덤과 달리 좋은 터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작인을 따라 온 감여(堪輿)가 주위 형세를 살피며 가만히 입술을 빼물었다.

"자리가 좋아 보이네만, 어떤가?"
"소신이 보기엔 이곳은 사두형(巳頭形)입니다."

"사두라면, 뱀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나으리."

뱀은 불사, 재생, 영생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벽촌이나 촌락의 부군당엔 뱀을 부군신령(府君神靈)으로 삼아 섬기는 걸 볼 수 있다. 후손들이 장지로 사용할 때 뱀 신은 재물을 관장하는 칠성신으로 여겨 좋은 터의 흙을 가져다가 떠받든다. 감여에게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일반적으로 사두형이라 부릅니다만, 이 자린 뱀이 똬릴 틀고 있는 사반형(巳蟠形)입니다. 재물을 후손에게 준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박초시는 모아놓은 재물도 적지 않은 데다 자식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 자가 후손을 위해 이런 자리를 장지로 썼다는 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일단 봉분을 열자, 무덤은 여느 것과 다르지 않게 값비싼 수의에 싸인 채 향나무 관에 들어 있었다. 그것은 무척 호화로운 것이었다. 관을 열어 주검을 살폈어도 이상한 곳은 없었다. 아주 편안한 죽음이었다.

사헌부 서리배가 가져온 초를 곳곳에 뿌렸으나 핏자국이 드러나지 않고 사체에 그물망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독살 흔적도 없었다. 이로 보면 박초시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정약용은 일단 봉분을 덮고 산에서 내려왔다. 기다리고 있던 서과가 입을 열었다.

"소인이 김역관 집에 들렀는데 그 사람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다 돼 갔습니다. 온종일 누워있어 등에 욕창이 번져 냄새가 지독해 친구들도 발걸음을 끊은 모양입니다. 그 댁의 시어머니는 이레 전엔가 이웃집에서 가져온 찰떡을 밖에 나간 며느리가 오기 전 단숨에 먹을 양으로 꿀꺽 삼키다 기도가 막혀 세상을 떴답니다."

"그렇다면, 그 댁 며느리 권씨만 혈혈단신 남았겠구만."
"아닙니다."
"아니라?"

"하늘도 무심치 않아 홀로된 권씨의 뱃속에 생명체가 꿈틀거렸답니다. 벌써 두 달째인 모양입니다. 해괴한 일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이름을 '남호(南呼)'라 지었다니 괴이한 일이 아닙니까."

"흐음, 아이 이름이 남쪽에서 불렀다?"
"그렇습니다, 나으리."

정약용은 앞뒤 정황을 살피며 대청을 서성거렸다. 근자에 일어난 여러 일을 볼 때 풀리지 않은 매듭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게 뭔가를 맘속으로 가늠질하며 밤이 깊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정약용이 매듭으로 여기던 두 달 전의 그 날, 권씨는 해가 떨어지자 윗목에 황촉을 켜고 보료 위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이곳 김역관 집안에 시집 와 알게 모르게 치마끈을 푼 게 몇 번인가를 헤아렸다. 쌀 몇 됫박을 얻기 위해 낯선 곳에서 몸을 뉜 게 두 번, 박초시와 세 번이었다.

박초시와 일을 치르던 첫째날 방물장수 아낙이 도망하더니 밤비가 초록초록 내리던 어느 날 방물장수 아낙이 찾아들었다. 미워하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왈칵 반가움이 일어났다.

"아니, 자넨 어딜 갔다 이제 오는가?"
"아씨, 시생의 처지가 궁핍해 아씨께 불손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비록 늦었으나 죗값을 치르려 들렸으니 아씨가 어찌 처신하든 쇤네는 서운해 하지 않겠습니다."

"이 사람, 모두 지나간 일이네. 그 얘긴 나도 접었으니 다신 얘길 꺼내지 말게. 한데, 오늘같이 비 오는 날 어쩐 일인가?"

"아씨, 사실은 얼마 전 박초시 그 양반을 만났습니다. 아씨와 인연을 만든 후 시름시름 앓더니 지금은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그 양반 사람을 시켜 여든 섬지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만 후손이 없어 물려줄 사람이 없었지요. 오가다 말을 들으니 어떤 사람이 이 댁 서방님이 죽으신 후 아씨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이 있는 데다, 뱃속에 든 아이를 '남쪽에서 불렀다'는 남호(南呼)라 한다기에 박초시 그 사람 가만 생각하니 이 댁에서 남쪽에 해당하는 곳이 자신이란 느낌을 받았지요. 혹시 아씨 뱃속에 있는 아이가 박초시의 피를 받지 않았나 해서 그 사람이 나를 부른 게지요. 아씨, 뱃속의 아이가 그 분의 피를 받았지요?"

아항, 요것이었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났지만 권씨는 꾸욱 참으며 시치미를 떼고 능청을 떨었다.

"집안 일을 어찌 함부로 얘길 하겠는가."
"아씨, 쇤네가 어제 그 분을 뵙고 약조를 얻었지 뭡니까. 만약 뱃속의 아이가 박초시의 피를 받았다면 평생 모은 재물을 아이에게 준다 했습니다. 그리되면 이 집안도 하루아침에 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글쎄···."
"박초시 말은 아씨를 직접 만나 자신과의 인연으로 자식이 생겼는지를 묻고 싶어 합니다. 만약 그분의 짐작이 맞다면 그 날로 모든 문서를 줄 것이며 자신이 죽은 날을 기점으로 제사만 지내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씨, 이번 일이 이뤄지면 쇤네에게도 한밑천 떼어주겠지요?"

"그걸 말이라 하는가. 떼어주다 말다!"
"한데, 그분께선 자신의 집에 오실 때 아씨께서 '궤보요'를 찼으면 하십니다. 그렇게 할 수 있지요?"
"그렇게 함세."

일은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날 따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물이 넘쳐난 삼개나루 갓길을 걷다 발을 헛디딘 방물장수 아낙이 목숨을 잃었다.

박초시는 아씨를 만난 그 날을 지나 그달 보름께 오랜 중병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는데, 사체로 발견된 방물장수 아낙의 왼손에서 뜻밖의 물건이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구슬 모양으로 만든 '궤보요' 알갱이가 아닌가. 흔치 않은 데다 방향(芳香)을 풍기는 귀한 물건인데 방물장수 아낙의 손에 있는 건 무슨 까닭인가?"

사헌부 관측대 위에 올려진 사체의 손에서 방향이 어린 구슬을 뽑아들며 정약용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주]
∎사반형(巳蟠形) ; 똬리를 친 뱀형
∎감여(堪輿) ; 풍수사
∎방향(芳香) ; 좋은 향기
#추리,명탐정,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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