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28회)

궤보요 <4>

등록 2011.04.26 10:38수정 2011.04.2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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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은 시각, 권씨는 무심히 쏟아지는 빗발처럼 하염없이 지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문득 박초시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병약한 박초시를 만난 그 날, 사내는 홀로된 권씨를 생각해 하나의 방책을 내놓았다.

"내가 이녁을 보자 한 것은 내 씨를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리하자면 뭣보다 대비전에서 자네 집안에 내린 '궤보요'를 확인하고 싶었네. 그게 자네에게 있으면 태어날 아인 사내건 계집이건 뭐라도 상관없네. 아이는 대비전에서 장래를 책임져 주니까 말이네. 이제 모든 걸 확인했으니 내가 가진 재물을 모두 자네에게 주겠네. 다만, 재물이 적지 않으니 자네 혼자 간수하기엔 벅찰 것이라 생각해 이제껏 내 재산을 관리해 온 오주부(吳注簿)를 소개시킬까 하네."


박초시는 문갑에서 쥘부채 하나를 꺼내들더니 권씨 앞에 내밀었다.
"내가 이녁에게 주는 이 부채엔, 남녀간의 운우를 나타내는 비익조(比翼鳥)란 새가 각기 반토막씩 그려져 있네. 어느 땐가 그것과 똑같은 부채를 들고 오주부가 찾아갈 것이니 자넨 정중히 받아들이면 되네."

몇 해 전까지 내의원(內醫院)에 몸담은 처지니 관직에 나간 중인(中人) 신분으로 믿을 수 있다는 점에 힘을 주었다. 붉은 천에 싸인 보자기를 권씨에게 건네고 박초시는 돌아누웠다. 돌아가라는 표현이었다. 그 날이 아스라하니 머릿속에 울려온다.

밤이 깊어 가는데 한 사내가 재빨리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안방으로 다가가 문을 가볍게 세 번이나 두드렸다. 불 꺼진 방문이 사르르 열리며 사내는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요즘은 어떠십니까, 아씨?"
"이제껏 자네 오기만 기다렸네. 자네 손끝이 막힌 경혈을 풀어준다 하니 가까이 오게. 자네 솜씨가 어떤지 내가 볼 것이야."

이미 오주부가 들르겠다고 연락한 처지니 권씨로선 황색의 미초(媚燭)를 켜놓은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타들어 간 황촉의 상태를 보고 오주부는 거침없이 대담한 짓을 자행했다. 단숨에 허벅지 안쪽의 경외기혈(經外奇穴)을 파고든 것이다.


남녀의 음양과 관계있는 혈로 '미혈(媚穴)'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다리 안쪽에서 허벅지 안쪽까지 붙은 혈자리다. 이곳은 엄지손가락으로 주욱 긋는 것으로 충분한데, 나이가 지긋해지면 부부가 함께 이 미혈을 마찰하는 게 한 방법이지만 오주부는 어린애 놀리듯 부분 부분의 요처를 점찍듯 눌러주었다.

잠잠히 있는 연못의 물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지는 파장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나, 그 파장은 서른이 안 된 권씨의 몸에 불을 질렀다.


사내의 손이 스쳐가는 부위엔 마치 벌을 쏘인 듯한 강렬한 느낌이 전해졌다. 금방이라도 사내를 끌어안지 않으면 견디기 어렵다는 듯 두 손을 허우적거리자 오주부의 말은 조금씩 은밀해졌다.

"사대부가의 마님들 심성이 극도로 쇠약해진 건 마음을 강팍하게 먹은 탓입니다. 일찍 남편을 사별한 대갓집 마나님들이 자신의 마음을 밖으로 나타내지 못한 채 각선생(角先生)같은 물건을 장롱 깊숙히 숨기고 육신의 허기를 달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부정한 짓을 피한다지만 그것으로 육신의 허기가 채워지겠으며 부정한 방법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아무래도 그것들은 사내 몸과 같을 수 없겠지요."

오주부의 손놀림은 좀 더 은밀해졌다. 그냥 눌러가는 게 아니라 한웅큼 벌컥 쥐었다가 사르르 풀어놓는 방법이었다. 완급이 그런 것인지 모른다. 순간적으로 미묘한 반응을 일으키는 하복부의 변화에 권씨의 얼굴을 벌겋게 변해버렸다.

"아씨, 진맥이란 이런 것이지요."
권씨는 이제 말할 수도 없었다. 이 곳 저 곳 오주부 손길이 스치자 시원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것은 온 몸을 쩌릿쩌릿 하게 하는 것으로 점차 시각이 흐르면서 뜨거워지더니 활화산처럼 폭발해버렸다.

그것은 순식간에 정념으로 변해 자신의 몸에 들어온 사내의 힘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강하게 조이며 몸부림쳤다. 날이 새도록 괭이처럼 이앓이를 하며 사분질을 하는 동안 어느덧 동창이 밝자 몸이 날아갈 듯 가뿐했다. 자신이 언제 아팠느냐 싶게 온몸의 혈맥이 거칠게 요동하다 제자리를 찾는 듯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서 오주부가 입을 열었다.

"궤보요는 대비마마가 공을 세운 김역관 집안에 내린 것입니다. 훗날 아들이 태어나면 중임할 것이며, 딸이 태어나면 내명부에 몸담게 할 생각으로 내린 것인데, 삼개나루에서 발견된 방물장수 아낙의 주검이 발견되자 정약용이 이 일에 관해 조사한다지 않습니까?"

"조사라니오?"
"박초시에게서 재물을 받은 그날, 아씨께선 방물장수 아낙과 걷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아씨께서 어찌 그 여인을 살해 했습니까?"

"그 여편네가 너무 요망해 삼개나루를 지나치다 바다에 밀어버렸지요."
"방물장수 아낙이 물에 빠질 때 궤보요를 잡아챈 것 같습니다. 죽은 아낙의 손에 궤보요가 있었으니까요."
"예에?"

"그 일을 상감께 아뢰고 아씨를 잡으려 하자 대비마마가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궤보요는 자신이 김역관 집안에 내린 것인데 사헌부 관리가 함부로 날뛴다고요. 마침, 통영동이가 백조요(百鳥謠)를 부르며 한양에 나타났다는 말에 정약용이를 잡을 계책을 마련한 것입니다."
"계책이라?"

오주부가 콧소리로 흥얼흥얼 노래하며 기름종이를 펼쳐들었다. 거기엔 엉성하게 끄적인 노래가사가 적혀 있었다.

장끼란 놈은 복색이 좋으니
별군직으로 돌려라,  동그랑땡 동그랑땡!

따오기는 나무를 잘 파니
목방편수로 돌려라, 동그랑땡 동그랑땡!

앵무새란 놈은 말을 잘하니
연설쟁이로 돌려라, 동그랑땡 동그랑땡!

아닌 게 아니라 그 시각, 조정은 발칵 뒤집혀 본격적인 탄핵이 삼사(三司)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삼사는 문무백관들의 기강을 감찰하는 사헌부와 군왕의 판단과 명령의 잘잘못을 간(諫)하는 사간원, 그리고 군왕의 학문이나 제술(製述)을 맡는 홍문관으로, 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삼사에서 일하는 관리들의 기개는 문자에 서늘하게 나타난다.

'벼락이 떨어져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서슴지 않는다(抗雷霆.蹈斧鉞而不辭).'

그러한 관리 중의 하나인 대사헌 구헌(具憲)이 정조 임금 앞에 엎드렸다.
"전하, 신 대사헌 구헌 한 말씀 아뢰옵나이다."
"말하시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조선은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일컬어 왔습니다. 대대손손 전해 내려오는 순풍양속이 있사오나 지금에 이르러선···."
"그런데요?"

"이 땅에 천주교(天主敎)라는 이단(異端)이 들어와 요망한 싹을 틔우려 하오니 도저히 수수방관할 수 없는 변고가 일어난 것이라 보옵니다."
"변고라니오?"

"전하, 천주교라 하옵심은 불교의 한 갈래와 같은 것으로 천당과 지옥을 주장합니다만 본래는 권선징악(勸善懲惡)에 있는 것이라 보옵니다. 천주교를 믿는 자들은 천주를 아버지라 칭하고 자신을 하늘백성이라 일컫습니다. 이것은 군왕을 부정하고 자기를 낳아 기른 부모님을 부정하는 금수와 같은 행동입니다. 마땅히 일망타진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오로지 공맹(孔孟)의 도에 정진할 수 있도록 철추를 내리심이 가하리라 생각하와 삼가 아뢰옵나이다."

"가만, 대사헌."
"예에."

"군왕을 부정하고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를 부인한다는 게 사실이오?"
"그러하옵니다."

"이곳에 모인 여러 언관(言官)들도 같은 생각이오?"
"그러하옵니다."

"언관들은 들으시오. 그 천주교란 것에 관심을 둔 백성들은 얼마나 되는가?"
"소인들은 일이 너무 화급한지라 아직 수효는 파악치 못했나이다. 무리들이 너무 많아 수효를 파악치 못했나이다."

"그렇다 해도 숫자는 알아야질 않겠소."
"전하, 천주교의 수효는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기세입니다. 진신(搢紳)이나 처사(處士)의 양반들 가운데서도 천주교에 물든 사람이 많다 하옵니다."
"그게 사실이오?"

"그러하옵니다, 전하. 특히 충청도 서산(瑞山) 등지와 평택과 진산 등이 세 곳은 거의 천주교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할 정돕니다. 이것은 혹세무민의 사독이 넘쳐난다고 보여집니다. 모두가 그곳의 수령이나 글께나 읽은 양반들에게서 미친 영향이니 전하께오선 밝게 통찰하시어 조선의 순풍약속이 하루 속히 광정(匡正) 하게 하옵소서!"

삼사의 탄핵은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세상을 그릇 판단하는 일의 하나였다. 그렇다 해도 일단 탄핵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천주교인들에게 무서운 철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있는 어진 관민(官民)들은 들을지어다. 듣자하니 군왕을 부인하며 부모를 부인하는 서양의 사학(邪學)이 전래되어 여러 사람들이 거기에 현혹돼 있다고 알고 있노라. 이는 혹세무민(惑世誣民) 멸륜패상(滅倫敗常)이니 수령 방백 가운데 현혹된 자가 있을 시는 즉각 사교에서 발을 빼 선량한 백성으로 귀환할 지어다. 삼사의 탄핵이 있어 이를 만백성에게 알리노라!"

조정에선 천주교에 대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속인다고 했다. 삼강오륜을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이라고 점을 찍었다. 이 무렵은 불교까지도 탄압하던 때였으니 천주교가 용납될 리 전연 없었다. 일단 어명이 내리자 천주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평택은 청천벽력이었다. 가장 먼저 평택현감 이승훈(李承薰)이 관졸들에게 얽매이자 이 소식은 득달같이 사헌부에 전해졌다.

"나으리, 소인 서과이옵니다. 평택현감께서 관졸들에게 끌려가셨다 하옵니다. 이것은 나으리가 궤보요를 함부로 다룬 김역관 집안에 대한 트집으로, 대비마마 가까이 있던 자들이 나으리까지 물고 늘어질 것으로 걱정하고 있나이다. 그들은 이번 기회에 천주교인들을 뿌리 뽑으려는 이상한 단체까지 만들어 공공연히 공서파(功西派)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하옵니다. 형부(刑部)에서는 관원을 풀어 '통영동이'를 잡기 위해 곳곳에서 기찰을 심해게 하고 있사온데 그 자가 천주교 서적들을 나으리께 은밀히 전하기 때문이라 하옵니다. 중신들은 나으리를 괴수로 여겨 당장 잡아들이라고 전하를 핍박하고 있다 하옵니다."

[주]
∎공서파(攻西派) ; 천주교 신자를 공격하는 무리
∎백조요(百鳥謠) ; 통영동이가 부르는 노래
#추리,명탐정,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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