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루머나 이슈에도 그의 존재는 늘 컸다.
서태지컴퍼니
실제로 그의 새 음반에는 로맨틱한 멜로디를 아우르는 특유의 스토리텔링과, 현악이 합쳐진 유기적인 이모코어 사운드가 배합된 만족할 만한 소리들이 뭉쳐있었다.
특히나 김석중이 가세한 세밀한 일렉사운드와 드러머 양혜승의 쪼개지는 비트는 그의 7집과 비교되는 특징이었으며, 그가 내세운 네이처 파운드(Nature Pound)라는 장르는 결국 '서태지'라는 아티스트가 추구한 완벽함을 넘어선 일종의 '진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과거 '혁신'을 추구하는 서태지의 음악과는 또 다른 변화였다. 그 스스로 만들어놓은 신비주의라는 마케팅 영역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점과 창조에 대한 강박이 결국 하이브리드라는 형식에만 집중된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건재했다.
한마디로 그는 세계를 움직이는 뛰어난 글을 쓰는 작가는 아니어도, 언제나 새로운 스타일을 고심하여 대중 앞에 화려하게 선보이는 유럽의 유명 디자이너 같았다.
그렇다. 실제로 그는 퇴보는커녕 결코 그 자리에 안주해서도 안 되는 아티스트였고, 그러한 위태한 상황에도 무사히 자신을 또 한 번 넘어서 보인 것이다.
하지만 그 섹션에 달린 누리꾼들의 댓글은 거의가 비난 일색이었다. 그것은 당연히도 서태지 음악에 대한 비난이 아니었다. 서태지의 음악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그의 음반에 10점 만점에 6.9점이라는 총점을 내린 다수 선정위원들의 짧은 식견에 대한 비난이었다. 소위 말하는 한국의 평론가 집단의 수준은 고작 그것 밖에 안 되냐는 것이다.
98년 발매된 솔로 1집이 해외 음악평론사이트에 올라 뉴메틀 밴드들에게 호평을 받았다는 이야기나, 그의 7집이 가장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대중음악 사이트인 올뮤직(allmusic)에서 별 네 개로 평가됐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 보였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서태지 음악이 단순히 소리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 것이 말이다. 평가할 수 없는 존재. 혹은 실력이 없다면 리뷰를 해서도 안 되는 음악. 한국에선 서태지의 음악이 그랬고, 그의 존재가 그러했다.
서태지와 이지아, 이들의 관계보다 더 궁금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