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신은정 감독.
최성욱
- 하버드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 배경은.
"처음 미국 가서 어떤 작업을 첫 다큐멘터리의 주제로 할까 고민했다. 그런데 어느날 부지불식간에 하버드가 떠올랐다. 스스로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내가 하버드 섬머 스쿨에서 영어공부를 했다. 또 남편인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가 하버드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를 지낸 이력으로 하버드가 주최하는 여러 행사에 자주 가게 되었다.
잘못 알고 있었던 이미지의 베일이 벗겨져가는 과정이었다. 하버드가 섬머 스쿨이나 하버드를 극찬하는 진보적 인사의 비디오를 틀어주면서 은근히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학문자유 수호에 앞장서왔는가 강조하더라.
또 한 가지 이해 안 됐던 게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대선 후보로 한참 거론될 때 하버드에 강연하러 왔다. 고건 전 총리도 대선 후보 거론되면서 하버드를 다녀가더라. 조지에게 이 얘길 했더니 "한국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하버드에 인사 와야지"하며 웃었다. 하버드는 단순한 대학이 아닌 전 세계 정치인들의 쇼 무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2006년 조지의 논문 주제가 5·18항쟁에 미국이 어떻게 개입했는가였는데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엘리트들의 회의에서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하는 결정이 나온다. 그래서 하버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하고, 이들이 어떤 교육을 통해 무슨 이데올로기를 양산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하버드라는 보이지 않는 제국의 실체를 밝혀보고 싶었다."
- 다큐멘터리의 주요 내용을 소개해 달라."큰 흐름은 하버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따라가는 것이다. 하버드가 부자들의 대학으로서 학생들이 파업진압에 동원된 사건, 하버드가 인종주의의 근원지화되면서 우생학을 어떻게 촉진시키고 이것이 나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고발한다. 또 남성중심 대학이었던 하버드가 여성을 어떻게 소외시켰는지, 2차 대전 후 냉전시대에 하버드가 미국 정부에 필요한 어떤 역할들을 했는지를 담고 있다.
특히 CIA의 전신인 OSS요원들이 하버드를 비롯한 미 대학들의 지역학 연구소를 어떻게 확장시켰고 이들이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추적했다. 또 하버드 출신 외교압력단체들의 행태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하버드 대학이 어떻게 변했으며 하버드가 러시아경제개혁에 어떻게 개입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도 하는 내용도 있다. 또 2008년 미국 금융위기에 대한 하버드 책임과 1000여 명 노동자를 정리해고한 하버드의 추악한 면도 담았다."
하버드는 왜 진보적인 학자들을 해고하지 않을까- 노엄 촘스키 교수 등 많은 인터뷰에 응해준 석학들이 많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결정한 이후 인터뷰를 할 많은 분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 분들 중 가장 빨리 대답을 준 분이 촘스키 교수였다. 하루도 안 돼 답장이 왔다. 촘스키 교수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라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촘스키 교수는 <냉전과 대학>이라는 책에 글을 썼는데 냉전시대 미국 대학들이 미 제국주의의 어떻게 부속물이 되었는지 고발하는 책이다. 이것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셨다."
- 다큐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지식인의 책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베트남전이 과거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베트남전에 찬동하고 복무했던 학자들이, 이라크에 가서 효율적 고문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 학자들이 학자적 양심과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심판 받은 적 없고 책임진 적 없기 때문이다. 하버드 학생운동 조직의 의장을 지낸 마이클 엔세라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학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정책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 하지만 그것이 이끌어낸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하버드 학자들은 늘 자유로웠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학자들이 정부 입맛에 맞게 정책을 마사지 해준 다음 그 대가로 신분과 지위 상승을 꾀하며 지식인의 책무를 망각해왔기 때문이다.
진정한 역사의식, 인간에 대한 애정 없는 자들이 지식인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썼을 때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이 시기 고등교육의 목표가 무엇인가? 20세기는 고등교육 급속히 확장된 세기였다. 20세기는 교육의 세기였지만 교육의 목적이 힘과 자본을 좇는 네트워커를 양산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교육의 목적과 목표가 왜곡된 것은 하버드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화두처럼 내 스스로도 진정한 교육목적이 무엇인지 의문을 가져보고 생각해보고 싶었다."
- 인터뷰했던 이 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누구였나."리처드 레빈스 하버드 의학대학원 과학자다. 하버드 내에 있는 몇 명 안 되는 진보적 과학자 중 한 분이다. 그는 하버드를 가장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길 '내가 진보성향이라고 하버드로부터 해고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버드 이사회 등 하버드의 주요 논의기구들이 주요정책을 결정할 땐 결코 나를 부르지 않는다'. 하버드가 왜 그를 데리고 있겠나? 하버드의 명예를 자랑하기 위해서다. '우린 이런 진보적 학자도 있다'...
하버드의 정체성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배계층은 세상을 자기 입맛에 맞게 조정하기 위해 지식이 필요하고, 지식인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인들에겐 최대한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학문적 다양성은 하버드의 구색 맞추기일 뿐이다. 하버드는 미국의 지배계층이 필요로 하는 지적 노동을 수행하는 기구다. 양비론으로 가다보면 문제점을 놓치는데 리처드 레빈슨은 하버드 정체성의 핵심을 잘 짚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