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시인, 처음 보고 '물건'인 줄 알았다"

새 시집 <저녁의 슬하> 펴내 ...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삶의 비애 녹여

등록 2011.05.14 11:40수정 2011.05.1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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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城) 앞 모텔, 이층 복도 끄트머리 콘돔 자판기 앞이었다. 우리가 처음 맞닥뜨린 곳은, 붉은 소화전 앞이었다. 이십년 전의 일이다. 기억의 날조와 편집을 피할 장사는 없으니 그냥 가자."

진주에 사는 김언희(58) 시인이 유홍준(49) 시인의 새 시집 <저녁의 슬하>(창비)에 쓴 발문의 첫 머리글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독자라면 '무슨 불륜'을 저지르고 20여년만에 털어 놓은 것인지 오해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새 시집 <저녁의 슬하>를 펴낸 유홍준 시인.
새 시집 <저녁의 슬하>를 펴낸 유홍준 시인.유홍준
진주 개천예술제 백일장 심사를 모텔 방을 빌려 할 때가 있었다. 진주성 앞 성수장을 주로 이용했다. 진주 한 공장 노동자였던 유 시인이 진주상공회의소 주최 '공단문학상'을 수상한 뒤 이듬해 개천예술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유 시인은 부지런하다. 진주에서 문학 행사가 열리면 나와서 자기 일처럼 거들었다. <진주신문> 주최 '가을문예' 시상식이 열리면 나와 허드렛일도 거들어 주고, 수상자들과 어울렸다. 역대 수상자들이 진주에 오면 유 시인을 찾을 정도였다.

"화가 난 아버지가 쇠스랑을 들고 어머니를 쫓아갔다 화가 난 눈썹이 보기 좋았다 1975년이었다 입동(立冬)이었다 내 그리운 쇠스랑 …/마당 저쪽 두엄더미에서는 하연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시 "그리운 쇠스랑" 전문).

김언희 시인은 "유홍준이 거북해 죽는 모양새로 먹자골목 국숫집으로 대학노트 두어 권을 엉거주춤 들고 나왔을 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회고했다. 유 시인은 김언희 시인과 함께 시 쓰기에 몰입했고, 10여년 뒤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2004년)이 나왔다.

김 시인은 "물건이 하나 나왔다고 떠들썩들 했지만, 사실 그 '물건'은 처음부터 '물건'이었던 것"이라고 했다. 유 시인은 2005년 '젊은 시인상', 2007년 '시작문학상'과 '이형기문학상'을 수상했다. 김 시인은 유 시인이 '물건'임을 직감했고 '물건'으로 만든 것이다.


"아버지도 나무속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도 나무속으로 들어갔다 나도 나무속으로 수목장(樹木葬), 도대체 나무속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 나뭇결이여 지나치도록 무엇을 오래, 하염없이 바라보면 눈동자에 옹이가 박힌다는 말!/내 시골집 기둥에는 그 말이 열 개나 박혀 있다"(시 "나무눈동자" 전문).

유 시인은 편안하고 안락한 '간접'이 아닌 힘들고 고달프지만 '직접' 경험한 세계를 시에 담았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직접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시인이 되고 교사가 돼?"라며 "간접은 지루하고 하품이 나고 직접은 재미있고 즐겁다"고 말했다.


 유홍준 시인의 새 시집 <저녁의 슬하> 표지.
유홍준 시인의 새 시집 <저녁의 슬하> 표지.윤성효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삶의 비애를 녹여낸 시들이다. 시골에 사셨던 어머니가 하셨던 '욕'도 들어보았고, '깻잎'도 따보았다. '욕'이나 '깻잎'은 시인의 가슴에 들어 '철학'이 되었다.

"짐승에게도 욕을 한다/짐승에게도 욕을 바가지로 퍼붓는다 어머니는/혀가 빠질 놈의 짐승이고, 잡아먹을 놈의 짐승이고, 때려죽일 놈의 짐승이다/어머니는 그렇게 욕을 바가지로 퍼붓고 가축들에게 사료를 준다/바가지로 탁/대가리를 때리고/바가지로 탁 등골짝을 때리면서 준다/그러면 내 착한 아들처럼/어머니의 짐승들은/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개를 처박고 후루룩후루룩 밥을 먹는다"(시 "짐승에게도 욕을" 전문).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깻잎을 딴다/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 웃음 날려보낸다/ … /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아아, 모처럼의 기쁨!(시 "들깻잎을 묶으며" 부분).

유홍준 시인의 시는 삶 그 자체다. 시인의 어머니는 자궁을 드러내는 수술을 한 모양이다. 드러낸 어머니의 자궁을 보고 마음이 지랄 같았단다.

"일흔네살/어머니가 자궁을 들어냈다/수술용 장갑을 낀 젊은 의사가 냉면그릇 같은 데 담아들고 와서 보여주었다/마음이 참, 지랄 같았다/스텐그릇 안의/어머니의/계란, 자궁을 본다는 것/끼니 때가 되어/어머니 뉘어놓고 길 건너 추어탕집에 가서 한 그릇 밀어 넣었다/요때기마다 자궁 들어낸 여자들이 누워 있는 방으로 돌아와/등을 붙이면/따뜻하다 야근에/지쳐 녹아내리는 몸이여/문득 어디 생리 중인 여자가 있어 울며 그녀와 살 섞고 싶다"(시 "어머니의 자궁을 보다" 전문).

유홍준 시인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1998년 <시와 반시> 신인상에 '지평선을 밀다'로 문단에 나왔고, 시집 <나는, 웃는다>도 펴냈다.
#유홍준 시인 #김언희 시인 #시집 <저녁의 슬하> #창비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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