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집 <저녁의 슬하>를 펴낸 유홍준 시인.
유홍준
진주 개천예술제 백일장 심사를 모텔 방을 빌려 할 때가 있었다. 진주성 앞 성수장을 주로 이용했다. 진주 한 공장 노동자였던 유 시인이 진주상공회의소 주최 '공단문학상'을 수상한 뒤 이듬해 개천예술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유 시인은 부지런하다. 진주에서 문학 행사가 열리면 나와서 자기 일처럼 거들었다. <진주신문> 주최 '가을문예' 시상식이 열리면 나와 허드렛일도 거들어 주고, 수상자들과 어울렸다. 역대 수상자들이 진주에 오면 유 시인을 찾을 정도였다.
"화가 난 아버지가 쇠스랑을 들고 어머니를 쫓아갔다 화가 난 눈썹이 보기 좋았다 1975년이었다 입동(立冬)이었다 내 그리운 쇠스랑 …/마당 저쪽 두엄더미에서는 하연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시 "그리운 쇠스랑" 전문).김언희 시인은 "유홍준이 거북해 죽는 모양새로 먹자골목 국숫집으로 대학노트 두어 권을 엉거주춤 들고 나왔을 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회고했다. 유 시인은 김언희 시인과 함께 시 쓰기에 몰입했고, 10여년 뒤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2004년)이 나왔다.
김 시인은 "물건이 하나 나왔다고 떠들썩들 했지만, 사실 그 '물건'은 처음부터 '물건'이었던 것"이라고 했다. 유 시인은 2005년 '젊은 시인상', 2007년 '시작문학상'과 '이형기문학상'을 수상했다. 김 시인은 유 시인이 '물건'임을 직감했고 '물건'으로 만든 것이다.
"아버지도 나무속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도 나무속으로 들어갔다 나도 나무속으로 수목장(樹木葬), 도대체 나무속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 나뭇결이여 지나치도록 무엇을 오래, 하염없이 바라보면 눈동자에 옹이가 박힌다는 말!/내 시골집 기둥에는 그 말이 열 개나 박혀 있다"(시 "나무눈동자" 전문).유 시인은 편안하고 안락한 '간접'이 아닌 힘들고 고달프지만 '직접' 경험한 세계를 시에 담았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직접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시인이 되고 교사가 돼?"라며 "간접은 지루하고 하품이 나고 직접은 재미있고 즐겁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