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살 집을 구하지 못하자 경성부장 할아버지가 '모자원'이란 곳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모자원'이란 곳이 모자를 만드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아버지가 없이 모친과 그의 자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모자원'이었습니다. 경성 부장 할아버지 말씀이 그 곳에 가면 방세를 내 필요도 없고 한 달에 한 번씩 먹고 살 쌀도 지급이 된다는 거였습니다. 엄마는 몇 번이고 경성 부장 할아버지께 고맙다는 인사를 했습니다.
이삿짐이라고 해 봤자 이불 보따리와 옷가지를 챙긴 보따리 몇 개가 고작이었지만 엄마가 친하게 지내고 있는 '하야'엄마가 우리의 이삿짐 나르는 것을 기꺼이 도와 주었습니다.
모자원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 변두리에 있는 오류동이란 곳에 있었고 우리 가족은 하야 엄마와 함께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는 서울에서 인천까지 오가는 경인선이라고 했습니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오류역이라는 곳에 내렸습니다.
우리는 역 앞쪽이 아닌 역 뒤쪽 철둑길 언덕 둑 위에 이삿짐 보따리를 잠시 내려놓고 미리 준비해 온 인절미를 먹었습니다. 역 앞쪽은 어떤지 모르지만 역 뒤쪽은 멀리까지 밭이 보였고 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떡을 다 먹기도 전에 한참 걸어야 한다면서 재촉을 했습니다. 하야 엄마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바로 오류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잘 사소. 너거들도 엄마 말 잘 듣고. 엄마가 얼메나 힘이 들겄노."
"하야 엄마 고마워요."
나도 작은 보따리를 하나 들고 엄마를 따라 화물기차만 다니는 철로를 죽 따라 걸었습니다. 화물선로 주변도 모두 밭뿐이었습니다. 나는 보따리가 너무 무거워 슬쩍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그 나이에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를 걸었는지 집들이 철로 옆으로 하나 둘 들어서 있는 것이 보이고 바로 동네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 안쪽에 '모자원'이 있었습니다. 철로 된 큰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마당이 보였고 왼편에는 작은 교회가, 교회와 마주 보고 있는 단독형 주택은 '모자원 원장' 집이고 대문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는 일렬횡대로 집이 길다랗게 붙어 있었습니다. 방 한 칸과 부엌들이 모두 똑같은 형태로 열지어진 게 앞쪽 말고도 뒤쪽으로 세 동이 더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자원' 사람들이 모두 사용하는 우물이 집 들 옆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모자원에는 수도도 펌프도 없이 모두가 이 우물의 물을 길어다가 세수도 하고 밥도 지어 먹는 듯 했습니다.
그 많은 집 들 중 우리가 머물 곳은 맨 앞 줄에 자리잡고 있었고 우물에서는 제법 멀었습니다. 우리의 방 옆에는 '모자원' 사람들을 원장 보조격으로 관리하는 '반장아줌마'의 방이 있었습니다. 이삿짐을 방으로 들여다 놓자 "새로 왔는가 봐요." 하며 아줌마 몇몇이 모여 들었고 아이들까지 덩달아 신기하고 재미 있는 것을 구경하듯 우리를 바라봤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아이 하나가 내게 먼저 말을 붙였습니다.
"너 이름이 뭐야?"
"학현이..."
"학현이? 나이는?"
"여덟살. 왜 자꾸 물어?"
나는 이곳 모자원이 낯설고 기분 나빴습니다. 아버지 없는 사람들만 모여사는 이 곳이 일반 사람들이 사는 집하고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왠지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반장 아줌마는 벌써부터 엄마한테 이 곳의 규칙을 알려주기 바빴습니다.
"절대로 남자를 들여서는 안됩니다."
"남자라니요? 남편 없이 얘들 먹여 살리기도 바쁜데요."
"처음에는 다 그렇게 얘기하지만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는 겸손하게 말했고 반장 아줌마는 엄마와는 달리 씩씩하고 활달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몇 십 가구의 사람들을 다스리는 중간 관리자이니까 더욱 힘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도 기분이 나빴습니다. 억압을 받는 느낌이랄까요. 원장님 집은 어엿하게 방 세 개와 부엌도 신식 부엌이라는 것이 내게는 위축감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모자원'의 첫 날이 흘렀고 저녁이 되자 엄마가 우물의 물을 길어다 저녁을 지었습니다. 반장 아줌마가 "이사 온 첫 날이서 반찬도 없을텐데..."하면서 방금 무친 겉절이 김치를 한 사발 건네주었습니다. 그 날 우리 가족은 밥을 먹으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나처럼 이곳이 너무 낯선 탓이었을까요. 잠시 후 밥상을 물리고 엄마가 입을 열었습니다.
"너거들 학교가 너무 멀어 걱정이다. 끝에서 끝이니."
"학교 갈려면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야 돼?"
언니가 물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야지. 기차 타러 갈려면 한참을 나가야 하는데..."
"엄마 나 학교 그만두고 돈 벌래요."
"무슨 소리고? 학교를 그만둔다니."
"그럼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요?"
중학교 3학년인 오빠는 어른처럼 말을 했습니다.
"안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는 다녀야한다, 알것나? 엄마가 곧 일자리를 알아볼끼다."
엄마는 서울말과 사투리를 섞어가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오빠를 타일렀습니다. 쌀이 나오고 방세를 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빠와 언니의 등록금이랑 차비, 쌀이 나올 때까지 먹을 양식도 사야했지만 엄마는 돈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나마 '모자원'으로 이사를 하면서 '하야 엄마'한테 빌린 돈이 전부였습니다.
"똑같이 남편 없어도 부모 형제가 도와주는데 나는 세상천지에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다."
엄마는 한탄에 젖어 혼자말인 듯 우리에게 하는 말인 듯 이어나갔습니다.
"우째 이렇게 복이 없을꼬..."
우리 삼남매는 엄마의 말을 듣고만 있었습니다. '하야엄마'한테 빌려 온 돈이 없었다면 당장 내일부터 언니와 오빠가 타고 갈 차비도 없는 것이 그때 우리의 형편이었습니다.
"불 끄고 일찍 자자. 내일부터는 새벽부터 일어나야 하니 일찍들 자그라."
그날 밤 우리 가족은 쉽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부스럭거리며 몸을 뒤채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고 이렇게 우리 가족은 '모자원'에서의 첫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2011.05.16 13:51 | ⓒ 2011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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