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는 공산당이 너무 많아! 군인들이 말했다

[연재소설] 미래는 남은자들의 유서이다(43)

등록 2011.05.18 08:17수정 2011.05.1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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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안사르에 있었다는 말은, 빛바랜 유대감과 경외심을 느끼게 했다.

 

그곳은 이스라엘이 운영하는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였다. 하데르는 아라파트의 자치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재판 없이 6년 동안 구금되어 있었다고 했다.

 

- 이스라엘이 민주국가라고 우기는 건,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지요.

 

그는 나와 통화한 뒤에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객실에 나타났다. 차갑고 건조한 어둠 속에 잠겨있던 피부는 투명한 잿빛이었고, 몸에서는 바싹 마른 담배냄새가 났다. 눈빛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며칠 전 그녀를 찾아달라고 처음 통화했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퉁명스러운 반감이 깔려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살육이 반복되는 전쟁지역에서, 비극적 사건을 경험했던 여자를 찾아달라는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이었을 것이다.

 

그는, 내가 남의 아픈 곳을 들추어 이익을 얻는 부류라고 여겼을 지도 모르겠다.

 

- 당신들의 투쟁이 반드시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

 

나는, 그가 과거를 밝힌 이유가 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직감했다. 그들은 내가 항쟁도시 광주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딱 끄집어 낼 수 없지만 정서적 공감을 전제로 한 말투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국가폭력에 대항해 어렵고 힘든 20대를 보냈다는 유대감 같은 것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 밤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 그녀를 만나는 건 불가능합니까? 

- 위험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군이 봉쇄조치를 취했다 해도 어딘가로 통하는 길이 있지 않을까. 하데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낮에도 라말라에서 취재 중이던 유럽 언론사 기자가 이스라엘 군인에 의해 총상을 입었다. 선명하게 <PRESS>라고 찍힌 취재 표시도 소용없었다고 했다.

 

야간 매복 중에는 무조건 총부터 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설명에, 할 말을 잃었다.

 

- 이모 부부가 1층 로비에 와 있는데, 만나 보겠습니까? 

 

그들 역시 하루 종일 도로에서 시달리다가 조금 전에 돌아왔다고 했다. 그럼에도 내게 안타까운 상황을 설명해주기 위해 호텔까지 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단된 머리통을 급하게 꿰매 이은 듯 몸과 의식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직접 전해줄 수 없다면, 그들 부부라도 만나 부탁해야 한다. 하데르와 함께 나가기 위해 일어났지만 쇳덩이를 허리에 찬 듯 몸이 너무 무거웠다.

 

- 아닙니다. 데려오지요. 식당도 문을 닫았고, 로비에서 만날 수는 없으니까요.

-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나는 하데르가 사라진 후에도 닫힌 문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은, 그녀가 죽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내게는 최소한 그런 의미였다. 마찬가지였다. 삼촌도 죽었으므로, 이제는 만날 수 없다.

 

------

 

그해 가을 아내는 모든 문제에 무관심했다.

 

오빠의 일조차 까맣게 잊었다는 표정이었다. 삼촌이 칼날을 되찾기 위한 희망의 행군을 선포했을 때, 아내는 큰 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텔레비전 뉴스를 보거나 신문을 들추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없다.

 

전직 대통령이자 쿠데타군 수괴들이 구속되었고, 5.18광주민주화운동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이제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전국이 들썩였지만, 아내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유모차를 밀고 저녁 찬거리를 사러 다녔을 뿐이다.

 

돌부처 뒤꿈치보다 끈질긴 무관심. 그것으로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내는 이미 사태의 시종(始終)을 꿰뚫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쿠데타군 수괴와 핵심주모자들이 구속되었다고 해서 역사가 바로 서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검찰은 확인된 범법행위로 범죄자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주인이 벌을 주라고, 동그라미를 친 자들에게만 죄를 물었다.

 

총알에게, 칼에게, 곤봉에게, 그것을 잡은 손에게 죄를 물을 수 없듯이, 상부의 지시대로 발포를 명했던 현장지휘관과 수하들, 시민들을 현장에서 즉결 처형했던 반인도적 범죄자들,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민간차량에 대한 무차별 발포와 집단학살, 부상당한 시민들을 계곡으로 끌고 가 살해한 자들과 그것을 지시했던 상급자, 사체를 유기할 것을 명령하고 묵인했던 자 등 앞으로도 국가의 필요에 따라 마르고 닳도록 써먹어야 할 실행도구들은 꼭꼭 숨겨두었다.

 

내가 책임진다니까, 너희들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 앞장 서 총대만 매준다면, 작당하여 못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가혹한 결과까지 책임져야 했다면, 과연 비무장시민들에게,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대를 향해, 부상자들을 구하려는 의인들에게 총을 쏠 수 있었을까.

 

살인자들과 실행책임자들을 기소하지 않은 검찰은, 본인이 권력을 위하여 범죄를 저질렀어도 현장일꾼이었으므로, 후환이 없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장 발포에 직접 책임이 있는 공수부대 지휘관은, 다음에도 그런 상황이 생기면 민간인들에게 가차 없이 총질할 것이라고, 침을 튀기며 웅변할 수 있었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죽기 때문이다.

 

검찰은 그날 그리고 다음날, 또 다음날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들에 대해서도 쿠데타와 상관없는 단순살인이라며, 공소시효가 이미 소멸되었다고 선언했다.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소형버스를 세워놓고 무차별 총격을 가해 15명이나 학살한 자들과 그것을 지시한 부대지휘관. 사망자들의 이마에 확인사살하고 부상자들마저 끌고 가 살해하고 암매장했던 군인들*과 현장지휘자.

 

다른 부대와의 오인전투로 전우를 잃은 원통함을 달래기 위해, 애꿎은 마을사람들을 모아 즉결 처형했던 범죄자들과, 그것을 지시하고 묵인했던 부대장.

 

집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임산부 머리를 조준 사격하여 태아와 함께 살해했던 자,

 

군용트럭으로 이동하면서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사냥용 표적으로 삼아 총질했던 자들과, 함께 즐겼던 자들.

 

도시를 봉쇄한 후 상부의 명령이라면서 차를 되돌리게 해놓고 무차별 총질하여, 다수의 민간인들을 살상했던 반인도적 범죄자들.

 

아쉽지만 그것들은 쿠데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단순살인의 공소시효 15년을 조금, 아주 조금 넘겨서 기소할 수 없다. 서운하겠지만.

 

시민들에게 쫓겨나 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패잔병들이, 장성이든 중령이든 소령이든 대위든 소위든 하사관이든 일반사병이든 모두가 시민들을 향해,

 

서서 쏘고, 쪼그려 앉아서 쏘고, 엎드려 쏘고, 벽에 기대서 쏘고, 건물에 숨어서 쏘고, 흥분해서 쏘고, 무서워서 쏘고, 화가 나서 쏘고, 정조준해서 쏘고, 눈을 감고 쏘고, 증오심에 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쏘고,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쏘고, 그냥 쏘라니까 쏘는 등 닥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감정이 일으키는 대로 개별적으로 시민들을 살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군대의 자랑스러운 민간인 학살행위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군부는 사전지시란 없었으며,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거나 장갑차가 전우를 죽인 것에 흥분하여 발생한 반나절 동안의 우발적 총질이었다고 주장했다.

 

정말이라니까요! 폭도들이 아세아자동차에서 탈취한 장갑차로 도청을 지키는 우리들을 쳤다니까요.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그러나 광주재판이 끝난 후 이루어진 증언에 의하면, 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병사를 죽인 장갑차는 시민 측의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밀려오는 차량들에 놀란 공수부대 측 장갑차가 후진하다가 일어난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군용장갑차는 무한궤도였고, 시민들 장갑차는 바퀴가 달린 신형이었다. 현장조사를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음에도, 검찰은 가해자들의 주장을 무조건 받아들였다.

 

또한 도청 앞 발포가 시작된 것과 동일한 시간, 전혀 다른 장소에서 임신 8개월의 최미애씨가 공수부대원의 조준사격으로 피살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공산당이 죽였다고? 광주에는 공산당이 너무 많았다고, 군인들은 주장했다. 

 

세계 최강의 전력이라 자부했던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그날 오후 어디서 무엇을 했던가. 그들은 부하들이 시민들을 학살하는 동안 현장에 없었던가. 아니면 그들도 정신없이 시민들에게 총질하느라 중지명령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인가.

 

검찰은 특별법에 의해 공소시효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데도, 반인도적 살인자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대신 전남도청 앞에서 오후 1시경 발포가 이루어진 후에 계엄사령관에게 뒤늦게 자위권 발동을 사주했다며, 전두환을 발포책임자로 지목했다. 시민들이 피살된 후에 총질하라고 말했다고, 그에게 발포책임을 덮어씌운 것이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80년 5월21일 오후 4시35분께 全斗煥 보안사령관의 <주도로> 국방부 상황실에서 周永福국방장관, 李熺性계엄사령관, 黃永時1군단장 등이 회동, 全씨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무장폭도로 규정하고 시국수습방안에 따른 정국장악 계획을 모르는 계엄군으로 하여금 자위권 발동 명목으로 발포토록 해 다수의 시민을 살해하도록 결의했다.'고 주장했다.

 

자위권 발동이 결의되기 전인 그날 오후 1시 경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가 비무장시민들에게 무차별 발포한 것은 결코 범죄가 아니다. 이것이 검찰의 결론이었다.

 

현장지휘관들은 혐의가 없다니까! 걔들은 현장을 사수하라는 지시를 발포명령으로 오인했을 뿐이야. 

 

그러나 검찰의 주장은 명백히 허위임이 드러났다. 재판과정에서 전두환은 '자위권을 결의'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검찰은, 그래서 '주도로'라는 교묘한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1980년 5월 검찰의 달력은 21일 20일 22일의 순서로 인쇄되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발포명령의 실체적 진실을 덮는 조건으로, 현장지휘관들을 기소하지 않기로 플리바겐(plea bargain)했거나 말이다. 

 

 

 

*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해당 공수부대 대대장은 그 사실을 나중에 상급부대 여단장으로부터 들었으며, 자기는 모르는 일이었다고 발뺌했다. 당시 특전사령관도 "보고가 있었다면 관련자들을 군사법원에 회부했을 것"이라며, 중대한 반인도적 범죄행위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검찰은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와 학살자들을 비밀리에 대질심문까지 했음에도 기소하지 않았다.

2011.05.18 08:17ⓒ 2011 OhmyNews
#광주항쟁 #발포명령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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