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설레발을 쳤으니, 모다 무죄 방면되었제

[연재소설] 미래는 남은 자들의 유서이다(54)

등록 2011.06.02 09:34수정 2011.06.02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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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을 들고 돌아왔을 때, 삼촌은 김치에서 삭은 밤을 골라먹고 있었다.

장모는 묵은 아침 신문을 뒤적이더니 쓱 밀어버렸다. 쿠데타 세력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을 앞둔 쟁점 정리 기사 제목이 슬쩍 엉덩이를 보이곤 종이 속으로 사라졌다.


- 앞으로도 마찬가질 거구만. 당하는 놈들만 빙신인 거제.

설혹 사형시킨다 해도 십 수 년 묵은 앙심은 절대 풀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 시방도 잠이 안 와서 누워있으면, 눈을 감고 있으면 군인들이 몽디 들고 달려오는 게 떠올라. 그때 참 험한 시상 살았네. 우리 아들 그래 불고 얼마 안 있어 그냥 그랬어.

원체 그 양반은 술을 안 자셨는디, 그래 불고선 술을 질러다가 모지리 묵어 불고 그르드만. 성실하고 뭐든 잘 헌 양반여. 그란디 그래져 불더라고.

장모로부터 당시 일들에 대해 듣기는 처음이었다. 죽은 처남 이야기였고 한 겨울 술 먹고 객사한 장인에 대한 회상이었다. 만나본 적이 없어서 실감나지 않았음에도 듣기 힘들었던 것은, 화자의 아물어지지 않은 고통과 분노, 원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장모가 술잔을 비우기를 기다려, 내 잔에 술을 채운 후 다시 장모 잔에 술을 부었다. 돌아간 장인어른을 위해 술잔을 비우기는 처음이었다.

- 안 지켜 본 사람은 모를 거시여. 참말로 피부로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징그라븟제. 하, 그건 도지 사람이라 볼 수 없는 거시여. 무섭더만. 관에다 딱 담아 났는디, 한꺼번에. 머리를 다친 건 눈뜨고 드다 볼 수가, 없어. 그래도 우리 아들은 배를 맞았제.


그리곤 다시 감정이 복받치는지, 장모는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누우, 또 우는 갑네.

텔레비전 속에 들어가 있는 삼촌도 한쪽 귀를 열고 있었던 모양이다.

- 쏘란다고 쏘는가? 총도 안 들었는디, 맨 손으로 있는디. 

아무리 쏘란 대도 그라제. 그게 사람인가, 짐승새끼들이제. 인두겁을 썼으믄 그라믄 안 되제.

한 놈도 벌을 받지 않았구먼. 그놈들을 벌했으믄 나라가 이꼴이겠는감?

용서 못하제. 백주대낮에 내 새끼 죽인 놈들을 어떻게 용서하겠는가. 그라고, 용서하고 싶어도 누가 죽였는지 모르는디, 으째 용서가 가능하겠는가.

그랬죠.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죠. 추임새를 넣고 싶었다. 그렇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고문하고 폭행하고 기소했던 자들, 사형,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던 자들, 감시하고 협박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롭혔던 자들. 아무도 추궁당하지 않았다.

뭐라 위로해야 장모가 묵은 한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까. 절망스러웠다. 나는 반쯤 남은 소주잔을 비우고 장모의 잔에 술을 따랐다.

- 광주가 민주주의네, 희생이네 어쩌구저쩌구 하는 놈들은 모다 주둥이를 찢어불고 싶었제. 그렇게 설레발을 쳤으니, 모다 무죄 방면된 거시지. 그러니 그것들이 떵떵거리고 잘 살고 있제. 지금도 말이시. 

술잔을 비운 장모가 텔레비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삼촌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우리 누우 좋아하는 게 뭘까? 그런 표정이었다. 드라마와 스포츠, 오락, 뉴스, 음악, 영화의 한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그러다 문득 채널이 멈춘 곳은 영화였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주제곡 「raindrops keep fallin' on my head」가 경쾌한 기타 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텔레비전을 보았다. 자전거를 끌고 나온 부치가 에타를 유혹하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영화에 눈을 고정할 수 없었다. 장모의 눈치를 본 삼촌이 다시 채널을 돌렸던 것이다. 두 사람이 자전거를 함께 타고 내려가면서 사과를 나눠먹는 장면은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월드컵 예선 축구경기들을 뚫고 지나간 후 드라마 <겨울연가>에 잠시 머물더니, 뮤직비디오, 뉴스, 게임을 돌아 다시 영화로 돌아온 것은 부치가 에타를 볏짚창고에 내려놓고 자전거 묘기를 부리고 있을 때였다.

- 그게 어디 보상인가, 입막음 할라고 그런 거제. 애국하려다 보이 그렇게 되었으니, 너희가 이해하꾸마. 살다보믄 그런 일도 있기 마련이란 말이제. 그라고 돈을 나눠준 거란 말이시. 

보상과 배상 사이에는 레떼의 강이 흘렀다. 찰나까지 걸러낼 쳇불로 씻겨나간 기억을 건져 올리지 않는 한 배상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면 국가를 아예 패대기쳐서 항복을 받아 내거나 말이다.

- 어쩌겠는가, 다 지난 걸. 나도 돈 쬐께 받은 걸로 먹고 살고 있응께. 그라니 죽은 놈들만 억울하제. 

나는 묵묵히 술잔을 비우며 장모의 술주정 같은 넋두리를 들었다.

그 사이 삼촌은 텔레비전 볼륨을 줄여버렸다. 그렇지만 술자리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늙은 누이의 서슬 퍼런 모습에서 죽은 엄마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 그라제. 그러니 삶은 무서븐 거시여. 무서븐 거시제. 

긴 한숨이 터지더니 장모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 무신 정신으로 지금꺼정 살았는지 몰라. 

맞아, 그래서 박 서방도 만나고. 이제 잊어뿌러. 다 잊어뿌러. 장모의 회상이 조금 더 이어졌다.

무엇을 잊는다는 걸까. 잊고 싶다는 것이겠지. 잊을 수 있다면 말이다.

오후의 노동으로 피로감을 이기지 못한 나는 방을 건너와 잠이 들었다. 잠시 발을 뻗고 기지개를 켜자는 것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지만 잠자리를 옮기면 숙면을 취하기 힘들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의미였고, 일상이 단순해지고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어느 순간이었다. 왜 깼는지 모르겠으나, 그냥 눈이 떠졌다. 침대가 아니라 방바닥에 등이 배겨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책상 위 스탠드 불이 나를 깨웠을 수도 있었다. 

- 등하야, 진실이란 게 있어? 그런 거 있어? 

몸을 돌리는데, 옆 이불에서 삼촌이 나를 보고 있었다. 깊은 절망과 분노로 충혈된 그런 눈빛이었다.

- 지금 몇 시야? 
- 나는, 내가 살아보니까 그런 거 없었어. 
- 아직 안 잤어? 
- 나는 왜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 순간 이 인간은 성욕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뭐라고 답해야 하나 싶은 막막함이, 그런 우스꽝스러운 의문을 끄집어냈던 것도 같다.

- 있어. 반드시 밝혀질 거야. 그러니까 자. 

그 후 삼촌은 더 이상 진실의 존재 여부를 묻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발견했던 것일까.
#광주항쟁 #집단발포 #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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