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지역 신문들.
김주완
여전히 많은 한국의 언론사, 관련 단체, 기관 및 학자들이 영국을 꾸준히 방문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 소속되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마치 순례하듯 BBC에 가고 <가디언>에 간다. 오죽하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기관들에서 오는 한국 언론 관련 인사들의 방문 계획이 너무 많아, BBC의 경우 유사한 한국 방문자들의 일정을 임의로 합쳐놓아서 동시에 방문한 한국 언론 관계자들이 현지에서 어색한 만남을 하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다.
기자가 약 3년 동안 현지에서 동행하여 방문한 사례만 보더라도 BBC와 <가디언>이 일정에서 빠진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는 방문 목적과 상관없이 BBC나 <가디언>만 수박 겉핥기식으로 둘러보고 나머지 일정은 관광을 즐기다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쨌든, 해외 선진 산업 방문이라는 대부분의 타이틀에 걸맞게 이들은 과연 영국 언론에서 많은 것을 배워 가는가? 혹은 얻어 가지 말아야 할 것을 오히려 배워가진 않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기자는 지난 6월 12일부터 18일까지 영국의 지역 신문을 둘러보고 지역 신문 발전 방안을 찾기 위해 방문한 한국언론진흥재단 산하 지역신문발전위원회 팀과 동행하여 영국 지역 신문과 한국 언론인들의 해외 연수 실태를 취재했다.
이들의 일정에도 BBC와 <가디언>은 포함되어 있었으나 다행히도 지역 신문을 책임지는 일꾼들답게 대표적인 영국 지역 신문인 <맨체스터 이브닝>이나 <레스터 머큐리>를 방문하고 조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배우지 말았으면 하는 내용들이 오히려 더 많았다.
영국 지역 신문, 여론 다양성의 부재와 독점"저희 지역에 경쟁은 없습니다. 대부분 한 지역에 하나의 지배적인 지역 신문사만 있기 때문이죠. 그나마 경쟁이라고 하면 지역 BBC 방송 정도죠." <레스터 머큐리>의 키스 퍼치(Kieth Perch) 편집장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인구 29만 명의 중소 도시 레스터에서 하루 6만 부가 판매되는 일간지인 <레스터 머큐리>에서 요일별 섹션 신문, 소지역별 무료 주간지 <메일>, 월간 잡지 <라이프>에다 모기업에서 발행하는 무료 일간지 <메트로>까지 책임지는 이 지역 신문사의 주인 역시 거대 미디어 집단인 데일리 메일 미디어 그룹이다. 즉, 영국 미디어의 현실에서 지역 신문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독점의 형태로 존재하며 이들은 트리니티 미러 그룹, 노스클리프 미디어 그룹과 같은 전국적 미디어 재벌의 계열사에 속해 있다. 건강한 대안적 지역 신문은 자리 잡기 힘든 현실이다.
"작년까지 운영하던 TV와 라디오 채널을 매각했습니다. 신문과 온라인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향후에 다시 통합해서 운영할 계획입니다." 이안 우드(Ian Wood) <맨체스터 이브닝> 편집국장 대행은 인터뷰에서 향후 다매체 운영 계획을 밝혔다. <맨체스터 이브닝>은 박지성이 속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소식을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한 신문이다. 이 신문 역시 작년에 거대 미디어 재벌인 트리니티 미러 그룹에 인수되었다. 그전까지 모기업인 가디언 미디어 그룹은 이 지역 신문과 연계한 <채널 엠(Channel M)>이라는 비교적 독립적인 성향의 지역 기반 방송 채널을 운영 중이었다. 하지만 결국 가디언 미디어 그룹은 지속된 경영난을 견디지 못한 채 <맨체스터 이브닝>을 매각했고, 이를 인수한 트리니티 측에서는 일종의 대안 언론 성향이었던 <채널 엠>을 곧바로 없애버렸다.
하지만 온·오프라인 매체 융합에 심혈을 기울이는 트리니티 미러 그룹 측에서도 전체 수익을 높이기 위해서는 역시 방송국도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현재 진행 중인 법 개정을 기다리고 있다. 작년에 보수당 중심의 정권 교체 이후 변화하고 있는 정책 흐름은 한마디로 지역 미디어 교차 소유 제한 조항의 철폐다. 우리의 종편과 상당 부분 유사한 정책이다. 즉, 현재 지역에서 시장 점유율이 50% 이상인 신문사는 그 지역의 아날로그 라디오 방송과 채널3 TV 방송을 소유하지 못하지만, 이 규제가 없어지면 자금이 풍부한 트리니티 미러 그룹 계열사 같은 지역 언론사가 모든 매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초우량 지역 독점 미디어(ultra-local media)'가 되는 것이다. 현재 영국의 유력 지역 신문사들은 물론 미디어 규제 기관인 오프콤(Ofcom)에서도 지역 신문사들의 경영난이라는 실제적 명분과 미디어 업계의 경쟁력 강화라는 당위적 명분 속에서 규제 철폐 안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