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꽃 찾아 천리길 행진
안건모
누군가 물었다. 이 행사엔 왜 참여했냐고. 아마 이런 대답이 돌아오길 기대했겠지. "이 땅에서 살인과 다름없는 비정규직 정리해고를 멈추게 하려면 이런 행사에 참여해야 하지 않나요?" 하지만 나는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이 행사란 평택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한진중공업까지 가는 행사다. 영도조선소에서 '한진중공업 비정규직노동자 해고 철회'를 요구하면서 35미터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180일째 농성을 하고 있는 김진숙씨를 만나러 가는 행사다. 지난번 '희망버스' 16대를 만들어 김진숙씨 농성장을 방문해 응원을 보냈는데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자 이번엔 185대 희망버스를 만들고자 하는 행사다. 왜 하필 185대일까? 김진숙 씨가 타워크레인에 올라간 지 185일째 되기에 '그냥' 만든 것이다. 그런다고 해결되냐고 코웃음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럼 아무 것도 안 하면 해결되나? 하는 절실한 마음이다.
물론 그 행사를 주최한 금속노조 소속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은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내는 밀알이 되겠다, 반성과 성찰의 죽비를 먼저 맞겠다" 하는 비장한 결의가 있었다. 김진숙씨 고공농성은 1931년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 일제의 착취와 수탈을 고발하며 최초로 고공농성을 했던 강주룡을 상징하는 농성이 됐다.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들이 회사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 노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7월 1일부터 7월 9일까지 8박 9일로 400킬로미터, 천 리를 걷는 행사였다. 하지만 나는 중간에 제주도에 갈 일이 있어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2박 3일 동안만 걷기로 했다. 내가 그 도보 행진에 며칠이라도 참여한 까닭은 미안해서였다. 사실 7월 1일부터 3일까지 백두대간을 타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 행사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포기를 했다. 남들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이런 때에 놀러 다니면 욕먹기 십상이다 싶었다. 그래서 누가 그 행사에 왜 참여했냐고 물으면 그냥 '미안해서'였다고 대답했다. 각설하고.
첫날, 쌍용자동차 정문에서 발대식을 갖고 출발했다. 처음에 사진을 찍은 이들은 모두 삼십여 명. 모두 가슴에 몸자보를 둘렀다. 앞에는 '소금꽃 찾아 천리길', 뒷면엔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제 2차 희망버스"라고 써 있다. "출발!" 쌍용자동차 해고자이고 금속노조 기획실장인 이창근씨가 소리를 질렀다. 노동자 교육센터 부대표이자 작은책 편집위원인 박준성 선생님과 나란히 맨 앞에 서서 힘차게 걸었다.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얼마쯤 씩씩하게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어라 몇 명 없네.' 우리를 촬영하고 인터뷰하던 인터넷 기자와 지방 신문 기자가 빠지고 평택에 사는 사람들 몇이 빠지니 열 명 남짓이다. 나는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적어도 30, 40명쯤 될 줄 알았다.
한 시간에 한 번 쉬었다. "자, 출발 3분 전!" 10분 되면 여지없이 일어나야 했다. 가는 거리가 정해져 있어 꾸물꾸물하면 계획대로 가지 못한다. 얼마쯤 가니 ○○신문에서 나온 사진기자가 차를 몰고 따라 와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아, 쫌만 천천히 걸으세요." 뒷걸음질치며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우리 걸음이 워낙 빠르니 안 되겠나 보다. "조금만 더 천천히요. 아, 조금만 더 천천히요."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안 되나? "저, 잠깐만요. 제자리걸음 좀 해 주세요." 뭐야, 사진 초보잔가? 우린 어쩔 수 없이 제자리걸음을 했다. 신문에 내 준다는데 마다 하리?
"아, 이거 되게 어색하네.", "폼이 안 나오는데?" 일행들이 웃으면서 제자리걸음을 한다. 어떤 이는 "헛둘, 헛둘" 하고 구호를 외친다. 사진기자가 렌즈를 바꾸면서 몇 번이나 사진을 찍는다. "얼마나 더 찍어야 돼요?" "아, 다 됐어요. 자 한 번만 더요." 에구, 힘들다. 아스팔트에 누워서도 찍고 서서도 찍는다. 백 컷은 찍었나 보다. 얼마나 잘 나오나 봐야겠다.
천안으로 넘어가는데 사람들이 지친다. 나도 힘들다. 등산과 축구를 하기에 걷기라면 자신 있는 나였지만 도로 걷는 건 쉽지 않았다. 매연과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숨쉬기가 쉽지 않았다. 단단한 아스팔트라 그런지 무릎도 아팠다.
"휴식!" 이창근씨가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 매체에 나온 우리 소식을 보여 준다. 기사 죽인다. "그들은 걷기도 하고 때로는 뛰기도 할 것이다"라고 거창하게 썼다. 누군가가 그 글을 보더니 한마디 했다. "여기 하나 빠졌는데 제자리걸음도 있었는데" "맞아, 맞아!" 모두들 웃음이 빵 터졌다.
선문대 천안캠퍼스를 지날 무렵 누군가가 자가용을 타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 이창근씨하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우리가 가는 길을 미리 알고 나와서 응원을 해 주는 것이다. 헤어질 때 후원금을 건네주는데 이창근씨가 "잠깐만, 사진을 찍어야지. 자, 여기 사진 인증샷!" 하고 다른 이한테 사진을 찍으라고 포즈를 취해 준다.
한 시간마다 쉬었다. 그때마다 박준성 선생이 노래를 부른다. "부용산 산 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으르러~" 모두들 지쳐갈 무렵, 드디어 오늘 잠을 잘 소정리역에 도착했다. 조그만 간이역이다. 역장이 나와 인사를 한다. 텐트는 역 안에 있는 공원에 치고 화장실에서 씻으라고 한다. "와우, 대우 괜찮은데" 모두들 지쳤지만 천막을 치고 저녁을 먹었다. 보신탕과 오리고기였다. 소주 한잔 걸치고 인사들을 나누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말고도 작은책 편집위원이고 역사학연구소 부대표인 박준성 선생님, 작은책 독자 이철희씨, 평택비정규센터 소장 남정수씨도 있다. 벌써 발바닥이 까진 사람이 있다. 모두들 지쳐서 텐트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다시 출발. 아침밥은 가다 먹기로 하고 5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하지만 짐을 정리하느라 6시나 다 돼 출발했다. 소정리역에서 전의역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날씨가 뜨겁다. 이대로 부산까지 갈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발바닥이 까진 사람은 호위하는 차를 운전했다. 전의역에서 발레오공조 해고 노동자와 쌍용자동차 동지 두 사람이 합류한다. 조그만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시원한 명태 해장국! 회사에서 일할 때보다 잘 먹는다.
산 고개 마루에서 쉬고 있었다. 명진 스님한테 전화가 왔다. 걷고 있는 모든 이들을 바꿔달라고 해서 고생한다고 힘내라는 말씀을 해 주신다. 다시 행진. 모두들 지쳐갈 무렵, 걸어가면서 박 선생이 노래를 한다. 노동가요부터 민중가요까지 가리지 않고 부른다. 가사는 드문드문 아는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모두들 따라 부른다. 쌍용자동차 정비지회 김정우씨는 모르는 노래가 없다. 박 선생이 판을 깔아놓으니 계속 노래가 이어 나온다.
"모두들 노래하세요." "옹헤야, 어쩔씨구 옹헤야. 저쩔시구 옹헤요. 에헤 에헤 옹헤야. 잘도 간다 옹헤야." 나중에는 그 노래에다 아무 가사를 막 갖다 붙이고 다른 사람들은 추임새를 넣는다. "작은책 대표!" "옹헤야" "안건모는" "옹헤야," "젊은이보다." "옹헤야," "잘도 걷네" "옹헤야. 에헤 에헤 옹헤야" "다리 아파" "옹헤야" "다리 아파" "옹헤야" "다리 아파" "옹헤야" 푸하하! 뭐야. 뭘 좀 집어넣어.
누군가 발라드 곡을 부른다. 어라, 그 노래에 맞추니 걸음이 느려진다. "야, 그 노래 부르지마. 걸음이 느려지잖아." 부를 노래가 없으니 뽕짝이 나온다. "아, 산이 막혀 모오오옷 시이나아요." "두우만가앙 푸른 물에 짜자자짠!" 박자까지 맞추면서 신이 났다. 뽕짝을 있는 대로 불러제끼더니 동요를 부른다. "뜸북뜸북 뜸부욱새 노온에서 놀고~" "산위에서 부우는 바아람 시원한 바람~"
발바닥도 아파, 무릎도 아파, 그걸 잊으려고, 또 더위를 잊으려고 노래를 부른다.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혼잣말인지 남한테 하는 말인지 쉴 새 없는 한탄이 나온다. "아, 왜 쉬는 데가 안 나오는 거야?" "앞에 좀 천천히 걸어!" "가자, 가자!" "일일 소옹정! 푸우른 물이 느을거 느을거 가았어도" "아, 그 노래 친일파 노래라며? 부르지 마." "친일파 노래라는 게 어떤가 한번 불러봤어." 끊임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걷는다.
걸어가면서 쌍용자동차 해고자 김정우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생활은 어떻게 해요?" "하하 어떻게든 먹고 살죠." "부인은 이해하나요?" "아내가 가족대책위 활동을 하면서 회사가 너무 심하다는 걸 알고는 다 이해하죠."
또 다른 해고자 오광수씨도 마찬가지로 아내가 가족대책위 활동을 하면서 이해한다고 했다. 오히려 남편들이 잘못될까 봐 걱정하고 있단다. 77일 동안 이어졌던 '옥쇄파업'을 경찰에게 헬기와 테이저 건 같은 총으로, 또 무차별 몽둥이를 휘두르는 폭력으로 진압당하고 난 뒤, 그 충격으로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자살하거나 병으로 14명이나 죽었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도 잘못될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을 듣고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나왔다. 더는 물어보지 못하겠다.
내판역에서 쉬면서 시원한 수박을 먹고 있었다. 어떤 여자 한 분이 온다. "안녕하세요?" 대전에서 사는 분이라는데 우리 일행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단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가 저녁은 못 사고요, 후원금을 드릴게요." "와! 고맙습니다!" 아무 관련도 없는 이런 이들이 이렇게 관심을 보여 주는데 가슴이 울컥한다. 산 고개를 넘자마자 쉬고 있는데 자가용 한 대가 선다. 한의사란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무료로 침을 놔 준다는 강용원 선생이다. 이런 분들 때문에 힘이 난다.
매포역 근처에서 쉬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왔다. 레몬트리 공작단 회원이란다. 레몬트리 공작단은 가수 박혜경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인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혼자가 된 아이들의 언니, 누나가 되고 싶다"며 만든 단체다. 서로 자기가 갖고 있는 재능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하자는 뜻으로 만들었다. 현재 레몬트리 공작단에는 정신과 의사 정혜신, 프로레슬러 김남훈를 비롯해 현직 조리사, 놀이 치료사, 주부, 대학생 등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 오늘 길에서 참여한 이 노주혁이라는 젊은이도 그 단체 회원이다.
쌍용차 해고자 김정우씨가 또 바람을 잡는다. "자, 오늘 동남아를 순회 공연하고 돌아온 한국이 낳은 가수 노주혁!이 노래를 하겠습니다."하고 기다렸지만 조용하다. 김정우씨가 산울림이 부르는 '구름모자' 노래 리듬으로 "병신 같은 게 노래도 못하고~"를 부르면서 재촉한다. 노주혁씨가 노래를 한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추임새를 넣으니 재미있다. 노주혁씨는 제목을 알 수 없는 요즘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한다. 열 곡을 내리 불렀다.
오늘 자고 갈 현도면사무소를 3킬로미터 앞두고 식당을 잡았다. 저녁을 먹고 나니 한의사 인 강용원 선생이 침을 놔 준다. "아픈 부위가 어디에요?" 모두들 허리와 다리에 침을 몇 방씩 맞고 일어났다.
현도면사무소에 도착했다. 오늘 걸은 거리는 43킬로 정도이다. 면사무소 화장실에서 씻고 모두들 잠자리를 잡았다. 새벽에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어 몇몇은 차로 들어갔고, 몇몇은 텐트를 접고 면사무소 정문 처마 밑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차로 들어갔는데 더위와 모기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침이 밝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두들 일회용 비옷을 입고 출발했다. 비가 점점 퍼붓기 시작한다. 신발에 물이 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무릎이 점점 아팠다. 12시 반 무렵, 옥천역을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식당을 들어갔다. 닭죽을 맛있게 먹었다. 여기서 나는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남은 사람들한테 미안했다. 모두들 점심을 먹고 누워 잠을 자고 있는데 나는 사전 답사를 가는 차를 타고 옥천역까지 가서 기차를 탔다. 내가 걸은 거리는 100킬로미터가 조금 안 됐으리라. 나머지 사람들은 또다시 300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