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이래 최대 국운상승의 기회라고 떠들어 대던 1988년 서울올림픽이 마침내 열리던 그 해, 올림픽을 위해 몇 년간 아침 길거리 청소도 하고, 버스 탈 때 줄도 섰지만 올림픽 경기는 단 한 경기도 치러지지 않았고 아마 한 명의 외국인 관광객도 들리지 않았을 작은 도시의 고등학교에 나는 입학했다.
작은 도시라고는 하지만 지역에서 하나밖에 없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약간의 자부심과 입학식 날부터 밤 11시까지 진행되는 야간자율학습의 고통이 그 시절 내 기억조각들의 대부분이었다.
그때 내가 중학생과는 다른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은 실제 소총 무게와 비슷한 플라스틱 모형 총을 들고, 허리에는 수통까지 차며, 군복을 입은 선생님에게 제식훈련을 받았던 '교련' 과목의 등장이었다.
선배들의 집단구타... 우린 한마디도 못 했다
학년 간 위계질서가 군인들의 계급 간 차이처럼 아주 엄격했던 당시의 고등학교 분위기와 학생들을 예비 군인처럼 취급했던 교련과목은 묘하게 어울렸던 것 같다.
교련시간도 입시위주의 학교정책 때문에 다른 예체능계 과목과 같이 자율학습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일 년 중에 단 하루 '교련'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각인되는 날이 있었는데 그것은 학교의 오랜 전통으로 내려온다는 '교련검열'이었다.
교련검열은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토요일 오후 1학년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2학년 학생회간부와 교련간부들이 실시하는 일종의 생활지도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단순한 생활지도에서만 끝나지 않고 선배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동반되었기 때문에 1학년 학생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런 시간중의 하나였다.
바로 옆 반의 매 맞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앉아서 조를 이뤄 끊임없이 들어오는 선배를 맞이하는 1학년들의 심정은 공포 그 자체였다.
선배들은 머리길이와 옷차림에서부터 교실 청소상태, 심지어 개인의 소지품까지 검사 했고 규정에 벗어난 학생이 있으면 어김없이 뒤로 불려나가 걸레자루로 매타작을 당했다. 그나마 교칙을 위반했다던가 해서 맞으면 좀 나은 경우였고, 이유 없이 불려나가 매를 맞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나 같은 경우는 키가 크다고 다른 큰 친구들과 함께 불려나가 맞았다. 어떤 경우는 아예 반 전체가 대답소리가 작다고 단체로 맞기도 했다.
'검열'을 빙자한 선배들의 공식적인 폭력행사는 교사들의 묵인아래 이루어졌다. 내가 2학년 때 어떤 교사는 수업시간에 웃으면서 "이번 교련검열은 좀 살살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한 선배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은 오래된 전통이라는 명목아래 학교 구성원들 중 누구하나 문제제기가 없었다. 폭력행위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1학년들조차도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분위기 속에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지나갈 정도였다.
그러한 교련검열은 내가 2학년이 되었을 때도 어김없이 재현되었다. 이번에도 중간고사를 치룬 어느 토요일, 학생회 간부를 포함한 수 십 명의 2학년들은 자율학습 중인 같은 반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환호를 받으며 긴 걸레자루를 들고 1학년 교실로 향했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1학년들의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는 아련한 추억의 노랫소리와 같이 2학년들을 미소 짓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월요일 학교에 갔을 때 담임은 싸늘한 시선과 함께 다짜고짜 지난 토요일 교련검열 갔었던 학생들을 불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난 교련검열 때 걸레자루에 맞은 1학년 학생 중 몇 명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공식적인(?) 묵인으로 일관했던 교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학생들을 다그쳤고 결국 몇몇 가해자 학생들은 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내가 3학년이 되었을 때 수십 년을 내려왔다는 전통의 교련검열은 더 이상 실시되지 않았다.(그 때 교련검열을 하지 못했던 2학년들은 안도했을까? 아쉬워했을까? 아니면 분개했을까?)
고작 1년의 차이지만 너무나 엄격한 선후배간의 위계질서, 그래서 선배들의 명령이라면 잘못되고 비상식적이어도 전통이란 명분아래 어쩔 수 없이 고분고분 따라야 하는 분위기, 자기가 선배가 되어서는 불과 1년 전 자신들의 모습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완벽하게 악습의 체제에 순응하는 모습,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묵인하며 방치하다가 정작 사고가 터지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발뺌하는 관리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하다는 그래서 귀신도 잡는다는 어느 부대의 총기사고 전후 사정을 들으면서 문득 생각난 아주 오래전 나의 경험담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상재씨는 대전시민아카데미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2011.07.21 19:27 | ⓒ 2011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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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2학년의 1학년 집단구타... 교사는 '오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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