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피드와 프쉬케 Francois Pascal Simon Gerard (1770 - 1837), 1798년작, 루브르 박물관
설레는 마음으로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는 상상을 합니다. 저는 파리에 자주 갈 수 있을 만큼 부유하지 않기에, 만약 한 번이라도 이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다면 그것이 아마 제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그 그림을 보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박물관에 갔더니 가족과 함께 보기에 불편하다는 관람객의 민원 때문에 국가가 그 그림을 전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좌절과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저는 절망감 속에서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현아의 <버블팝>이 방송 규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던 기분이 바로 이러한 절망감과 상처입니다. 우주의 조화와 천운으로 현아와 동시대에 그것도 같은 장소에 살 수 있는 기적같은 일이 나에게 벌어졌건만, 어이없게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들 몇 명 때문에 그 공연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저를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어린 여자 가수의 섹시 댄스를 보고자 하는 중년 남성의 더러운 욕망이라고 하신다면, 저는 흔쾌히 수긍해 줄 수 있습니다. 숭고하고 고귀한 가치에 대한 추구라는 허세와 가식 따위로 그 욕망을 가리려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말씀드리는 바, 저를 아무리 '더럽다' 할지라도, 국가권력의 힘으로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고 통제하려는 그 파쇼적이고 음란한 욕망만큼 추악하고 소름끼치지는 않습니다.
현아의 <버블팝>이 제라르의 그림이나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보다 문화적 가치와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한다면 까짓것 기꺼이 수긍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문화자본에 의해 생산된 상업적 공연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역시 수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하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문화예술적 공연이라는 점에서만큼은 전혀 다르지 않으며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기간 교육과 훈련을 받으시고 수준 높은 예술적 감각을 성취하신 분들이 저에게 저열하고 한심한 문화적 취향을 가졌다고 지적하신다면 그것 역시 까짓것 수긍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문화적 취향이 저열하고 상업화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향유할 권리가 제한받아도 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젊은 여자 가수의 표현의 자유도 보장해 주지 못하고 소박한 문화적 취향의 향유도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가 과연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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