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한 장면.
세인트 폴 시네마
"67세 남자 한 달에 받는 연금 64만 원, 65세 여자 한 달에 받는 연금 10여만 원."
얼마 전 TV에 소개된 어떤 부부의 국민연금 이야기다. 65세 된 아내는 "난 직업은 없었지만 연금을 부었어요, 내 친구들 중에서도 국민연금을 부은 사람은 나 하나였죠, 적은 돈이지만 다달이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되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라고 말했다.
직업이 없는 아내였지만 국민연금을 받기 수 년 전부터 연금을 부어 몇 년 전부터는 한 달에 한번씩 10여만 원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대목이 강하게 와 닿았다. 그렇게 남편과 아내가 한 달에 받는 연금은 대략 75만 원 정도. 그들의 얼굴은 근심과 걱정이 없는 듯 평온해 보였다. 난 그 장면을 보며, 그들의 여유로운 노후가 부러워졌다.
물론, 우리 남편이 직장을 다니면서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남편은 국민연금이 시행되자마자 가입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하지만 남편은 이직을 하면서 국민연금을 모두 찾아서 썼다.
예전에는 이직을 할 경우, 가입자가 원하면 그동안 부어왔던 연금을 한꺼번에 탈 수 있었다. 하지만 1999년부터 이직을 해도 국민연금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국민연금관리공단에 따르면, 1999년 전에는 퇴사를 한 후 1년 동안 재가입을 하지 않을 경우 그동안 부어왔던 연금을 타서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때 연금을 타지 않았다면, 우리도 지금 약간의 연금을 탈 수 있었을 텐데... 물론 목돈을 손에 쥘 땐 정말 좋았지만 지금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이 초등생 때 닥친 시련... 빚이라면, 너무 무섭다그렇다면 난 왜 여태까지 이렇다 할 노후대책을 세우지 못했을까? 지금 같이 사회 노령화가 가속화되고, 노후 대책이 중요하다는 것을 예전에 알았더라면, 다달이 조금씩이라도 모아 튼튼한 노후대책을 세웠을 것이다. 혹자들은 노후대책은 무슨, 자식들에게 도움을 받으면 되지, 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세상 부모 중에 자식에게 손 벌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내 또래 부모들은 젊은시절, 노후대책은 꿈꾸지도 아니 꿈 꿀 수도 없었다. 1980년대에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우리집은 큰 고비를 만나 살고 있던 집도 팔고 작은 전셋방을 겨우 얻어 살았다.
하지만, 큰 시련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은 그 후유증이 현실의 삶을 흔들어놓았다. 다달이 조금씩 빚을 갚아 나가면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때 남의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몸과 마음으로 겪었던 탓에 구멍가게 외상거래도 무서워서 하지 않았다. 정말 반찬으로 간장 한 가지만 있으면 그것으로 감사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 주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교육비는 그 시절 우리 가정의 경제에 많은 부담을 주었다. 거기에 더해 남의 집 살이도 지겹고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내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도 나에겐 큰 숙제로 다가왔다.
아이들 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학원을 보내는 대신 집에서 같이 문제집을 풀기도 하고 주산을 가르치기도 했다. 참고서는 동네 아이들 선배에게 미리 물려달라고 부탁해서 받아 썼다. 아이들은 나날이 자라 중고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변두리에 융자를 받아 작은 아파트도 장만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아이들, 저축은 꿈도 못 꿨다하지만 두 아이가 대학교를 가면서는 '저축'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돼 버렸다. 빚을 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딸아이는 문과지만 아들아이는 등록금이 비싼 이과에 진학했다. 1년에 두 번씩 두 아이 대학등록금을 내고 나면 허리가 휘고 입안에 침이 다 마를 정도였다. 그러니 노후대책이란 말을 먼나라 이야기처럼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마도 그런 단어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일이라고 여겼고, 밥은 굶어도 교육은 시켜야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절대 빚은 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어쨌든 두 아이 대학등록금을 무사히 내고 나면 은행통장은 텅텅 비었지만,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그때 최고의 목표는 두아이 등록금 마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집안 형편을 잘 아는 두 아이는 가끔씩 장학금도 타서 우리부부를 기쁘게 해주었다. 그런가 하면 방학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기들 용돈은 스스로 해결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부모로서 안타깝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딸아이는 첫 아르바이트를 해서 받은 돈을(4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에게 주었는데 몇 달 동안 쓰지도 못하고 꺼내어 보기만 했었다. 그러다 큰아이가 졸업을 하고 바로 취업이 되어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숨 돌리자, 또다른 어려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삶이란 숙제의 연속이란 생각이 그때 많이 들었다. 몇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한 딸아이에게 결혼이란 큰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부모가 아무것도 안 해준다 해도 마음마저 그렇지는 못하는 법. 조금씩 저축해 놓은 것 중에 부모로서 약간의 성의 표시를 한 것이 전부였다.
몇 년 후 작은애가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서, 지금 제 밥벌이를 잘하고 있으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다. 이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제 갈 길로 방향을 잘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견디기 힘들면 이파트 모기지론 해서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