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시퍼런 허다 허믄 다 비싸유!"

갈 때는 부자 된 기분, 올 때는 도둑맞은 것처럼 허탈

등록 2011.08.21 10:37수정 2011.08.2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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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안집에서 맛이나 보라고 가져온 마늘을 건조시키고 있는데요. 김장때 마늘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안집에서 맛이나 보라고 가져온 마늘을 건조시키고 있는데요. 김장때 마늘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 조종안


올여름에는 휴가를 차비 한 푼 들이지 않고 얹혀서 다녀왔다. 먹는 음식도 마찬가지. 두어 달 전, 안집 아주머니가 작년 가을에 밭에다 심어 거둔 것이니 맛이나 보라며 육종마늘 한 접과 된장 한 단지, 쌀보리 10kg을 주어서 고마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고 있다.  


반찬도 마당의 텃밭에서 따온 풋고추와 된장, 젓갈 등이 밥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지출이 없으니 생활비가 좀처럼 축나지 않았다. 만 원짜리 지폐가 두둑한 지갑을 보는 재미에 한동안 마음이 든든하고 즐거웠다.

어제(19일)는 아내가 낮 근무를 마치고 일찍 퇴근했다. 아내는 지난 화요일부터 계속 낮 근무여서 퇴근해도 집에 오지 못하고 병원 기숙사에서 지냈다. 며칠을 '독수공방'으로 지내다가 퇴근하는 아내를 보니 공원에서 잃어버렸던 아이 찾은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a   얼큰하면서도 개운한 국물 맛이 끝내주는 ‘고구마순 찌개’.

얼큰하면서도 개운한 국물 맛이 끝내주는 ‘고구마순 찌개’. ⓒ 조종안


반가움도 잠시. 아내 얼굴을 보니까 민물 새우가 들어간 고구마 순(감자순) 찌개와 매콤달콤한 맛에 발라먹는 재미까지 더하는 풀치조림, 아삭아삭한 열무김치 등이 먹고 싶어졌다. 어렸을 때 쌀가게 문을 닫고 들어온 어머니를 보면 군것질거리가 이것저것 생각나던 것처럼.

마침 1톤 트럭을 몰고 다니는 생선장수 아저씨가 "자 빨리들 오세요. 흑산도 참조기가 스무 마리 만 원, 스무 마리 만 원, 싱싱한 참게가 여섯 마리 만 원, 여섯 마리 만 원···"을 외치면서 지나갔다. 녹음되어 반복되는 소리지만 정겹게 느껴졌다. 시장에 가라고 부추기는 소리로도 들렸다.  

"어이 우리 오랜만에 시장에나 다녀올까? 며칠을 된장하고 장조림 간장에 밥을 비벼 먹었더니 얼큰한 찌개가 생각나기도 하고. 자기가 담가준 김치도 거의 먹었거든."
"그럼 잘 끓이는 김치찌개라도 끓여 먹지 그랬어요. 아무튼 좋아요. 나도 오랜만에 시장 구경이나 해야겠네."


합의가 쉽게 이루어져 부자 된 기분으로 아내와 시장에 나갔다. 작년만 해도 아내가 쉬는 날이면 변산반도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면서 줄포와 곰소에 들러 젓갈이랑 풀치랑 사다가 맛있게 먹었는데 기름이 리터당 2천 원 가까이 오르면서 바람 쐬러 나가자는 말도 못했다.

"요새는 시퍼런 허다 허믄 다 비싸유!"


a  손님이 오는 줄도 모르고 고구마순 껍질을 벗기는 채소가게 아주머니.

손님이 오는 줄도 모르고 고구마순 껍질을 벗기는 채소가게 아주머니. ⓒ 조종안


a  채소가게의 고구마순. 옛날에는 '감자순'이라고도 했는데요. 서민들이 비싼 열무나 배추 대신 김치를 담가먹었습니다.

채소가게의 고구마순. 옛날에는 '감자순'이라고도 했는데요. 서민들이 비싼 열무나 배추 대신 김치를 담가먹었습니다. ⓒ 조종안


채소가게부터 찾았다. 찌개 끓일 고구마순과 김치 담글 열무를 사기 위해서였다.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고구마순 껍질을 벗기는 아주머니에게 한 묶음에 얼마냐니까 3000원이라고 했다. 작년 여름 1000~1500원이던 게 3000원으로 뛰다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얼큰하고 개운한 고구마순 찌개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아주머니가 "요새는 시퍼런 허다 허믄 다 비싸유!"라며 두 묶음에 5000원만 달란다. 아주머니의 선심(?)으로 재래시장의 백미인 '흥정'이 시작되었다.

a  진열된 열무(앞)와 배추(뒤). 두 달 가까이 장마가 지는 바람에 지방의 채소가 나오지 않아 서울, 경기 지역에서 가져다 판다고 합니다.

진열된 열무(앞)와 배추(뒤). 두 달 가까이 장마가 지는 바람에 지방의 채소가 나오지 않아 서울, 경기 지역에서 가져다 판다고 합니다. ⓒ 조종안


한 푼이라도 깎으려고 밀고 당기는데 옆에서 구경하던 아내가 열무를 가리키며 한 단에 얼마냐고 묻는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돌리더니 "한 단에 5천언씩 팔었는디 아주머닝게 기냥 4500원만 주셔유~"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아내를 언제 봤다고 또 선심을 썼다. 

힘겨운 줄다리기는 계속되었고, 고구마순 세 묶음에 6000원, 열무는 두 단에 9000원으로 합의를 보았다. 아주머니는 열무와 감자순을 비닐봉지에 담으면서 "아줌니는 얌전 허신디 아자씨는 왜 그렇게 깎는댜. 아자씨 같은 양반만 있으믄 장사 못혀먹는당개"라면서 활짝 웃었다.

갈 때는 부자 된 기분, 올 때는 도둑맞은 것처럼 허탈

a  시장에 나온 민물 새우. 옛날에는 참 흔했는데 요즘은 귀족대우를 받고 있지요.

시장에 나온 민물 새우. 옛날에는 참 흔했는데 요즘은 귀족대우를 받고 있지요. ⓒ 조종안


발길을 생선전으로 돌렸다. 마른 박대를 사려고 가는데 건너편 역전시장에만 나오던 민물 새우가 보였다. 발품을 팔지 않아서 좋았지만, 얼마냐고 묻는 게 겁났다. 해서 "새우 3000원어치만 주세요"라고 했더니 얼른 달려와 한 보시기 담아주었다. 3천 원어치는 안 판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한 달쯤 되었을까. 단골 반찬가게에서 김치를 5000원어치 이상만 판다고 했을 때도 물가가 많이 올랐구나! 하고 말았다. 그런데 고구마순이 한 묶음에 3000원 하는 걸 보니 무엇이든 값을 물어보는 것조차 겁이 났다.

a  다듬지 않은 쪽파. 채소가게 아주머니는 대목에는 더 오를 거라며 걱정하더군요.

다듬지 않은 쪽파. 채소가게 아주머니는 대목에는 더 오를 거라며 걱정하더군요. ⓒ 조종안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오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음먹고 나갔는데 발길을 돌릴 수는 없는일. 해서 쪽파 한 단(10000원)하고 마른 박대 12마리(10000원), 꼬들꼬들하게 말린 풀치도 두 무더기(1만5000원)나 샀다. 얼추 계산해보니 작년보다 쪽파는 두 배, 풀치는 50%가 오른 것 같았다. 

오전에 부른 가스(20kg)값 4만2000원까지 더하니까 하루 지출이 9만5000원이었다. 지갑이 얇아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찬거리를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내가 쉬는 날 반찬을 만들어놔야 했기 때문. 지출은 과했지만 열흘 정도는 입이 즐거울 것 같았다. 

장보기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데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봤으면 속도 모르고 "한꺼번에 먹고 도망갈 일 있냐?"라고 했을 것이기에. 갈 때는 부자 된 기분이었으나 돌아올 때는 도둑맞은 것처럼 허탈했다. 그래도 어머니 생각을 하니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물가 #재래시장 #고구마순 #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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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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