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 근 일주일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게스트하우스에 틀어박혀서 지냈다. 미국인 동성애 커플 대신 빨간 하이힐 일행이 그 방을 차지한 이후로 우린 그녀와 자주 어울리는 동안 점차 그 동성애 커플을 떠올릴 때 솟아나던 눈물들도 말라갔다. 그저 시간과 망각 속에 지나가고 다가오는 계절들 처럼 모든 감정들은 처음보단 단련되어진단 걸 알게 된 것이다.
가이드 말대로 우린 여행자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누누이 느끼며 끝없는 투어를 계속해나갔다. 그리고 인형웨이터와 쌍둥이들까지 가방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 까지 포함해서 우리의 임무는 점점 무거워져 갔다. 분노의 술이 익을 때 까진 우린 그저 주어진 대로 삶을 달려나가야 하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투어 일정이 연기되거나 하면 어김없이 방안에 틀어박혀 일기장을 읽어나갔다. 그 애 역시 이 게스트하우스 어딘가에서 우리같은 일정을 거쳐지나갔으리란 기대와 함께 말이다.
1999년 10월 5일
내 얘기를 듣던 시인은 멘도사 와이너리에 다녀오라고 했다. 때마침 그는 멜레나에게 보낼 길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던 중이어서 꽤 감상에 젖어있던 참이었다. 커피를 한잔 가져다 주겠다고 하니 그는 매우 고마워하며 깍지 낀 손을 입가에 대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그려진 찻잔을 장에서 꺼내 주었다. 그건 까미니토 거리의 어느 예술가가 만든 작품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커피를 그득 담아다 주었다.
진종일 가을비가 끝없이 내렸고 골동품 촛대 아래서 글을 쓰는 시인의 모습이 유리창에 비쳤다. 빗물은 유리창 위의 그를 계속 지우려 애썼지만 불빛은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더욱 세밀하고 아름답게 시인의 옆모습을 그려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훅' 물더니 종이 위에 마지막 서명을 아주 날렵하게 휘갈겼다. 그리곤 내쪽으로 돌아보며, 이 여행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주 짧고 간결하게 '아름다움이 뭔지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왜냐고 물었다. 나는 그간 추함에 발을 헛디뎌서 떨어져도 봤고, 그 가운데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봐요들! 멘도사 와이너리에 가야하니까 다들 짐 싸요!"
한참 일기장에 빠져 있는 참에 방문이 화들짝 열리더니 숨이 턱에 찬 가이드가 들어섰다. 그리고 안으로 박차고 들어온 그녀는 자기 멋대로 우리 옷가지들이며를 주섬주섬 그러모아서 캐리어백에다 쑤셔넣기 시작했다. 조제는 의자에서 슬며시 일어서선 가이드 곁으로 다가서선 무슨 이따위 기분내키는대로 막 하는 관광이 다 있냐고 윽박질러댔다. 그러자 가이드도 질세라 배를 쑥 앞으로 튕기며 무료여행자면 그저 따라 오는 게 수순이라고 고함을 쳐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조제와 나, 그리고 가방 안에 든 인형웨이터와 쌍둥이는 꽤 지루한 시간을 가득 담고 멘도사 와이너리를 향해 떠나갔다. 게다가 우리를 뒤따라서 '빨간 하이힐'과 할머니, 피디 일행도 곧 도착해서 그때부턴 자전거를 빌려타고 다들 와이너리 투어를 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드넓은 포도밭의 아침 향기를 구경하고 나면 컴컴한 와인 숙성실로 달어갔다. 그리고 나면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여성 소믈리에가 영 시원찮은 영어로 내뱉는 설명을 들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게 그 다음 임무였다. 그 전 투어객들이 마시고 간 잔을 급히 씻어낸 것 처럼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잔에는 쥐똥 만큼씩의 와인이 부어져서 각자의 앞에 놓여졌다. 그러면 우린 지상낙원에 온 것 같은 표정으로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었다.
아르헨티나가 와인대국이었지만 그 많은 와인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에 부진했던 이유는 자국민들 스스로가 와인을 많이 마시는 풍조 때문이었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한마디로 그 나라에서 나오는 와인은 자기네들 끼리 먹으면 딱 맞는 양이기 때문에 굳이 남한테 팔 것은 없었단 소리다. 게다가 아르헨티나 와인은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를 거는 산업에 치중했던 탓으로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지진 못했다고 한다. 세계 5위를 자랑하는 와인 생산국 아르헨티나는 세계 3위의 와인 소비율을 가진 나라기도 하다. 그 중 멘도사는 아르헨티나 와인 생산량의 70%를 담당하는 곳이다. 우린 그곳의 포도밭에 주렁주렁 달린 채 서서히 끓어오르는 열망과 탐욕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