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처방 하는 날은 선생님도 아프단다

선생님이 쓰는 교실일기

등록 2011.09.15 17:59수정 2011.09.1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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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아이들

"얘들아, 추석은 잘 지냈니?"
"네~~"
아이들의 대답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직감적으로 숙제 때문이란 걸 알았습니다. 어제 오후 늦게 결려온 학부모님 전화 내용으로 봐서 미리 짐작을 하고 들어선 교실.

"선생님께서 추석 연휴 과제는 일기만 쓰라고 하셨다면서요?"

"아닙니다. 추석 연휴가 길어서 알림장을 쓰는 대신 따로 인쇄물을 만들어서 주었는데 못 보셨나요? 아마도 00가 내 말의 끝부분만 듣고 그런 모양입니다. 추석날은 일기만 쓰고 다른 과제는 없다고 했을 뿐, 평상시와 같은 과제를 냈습니다. 하루 1시간 정도면 해결될 숙제였습니다.

그러잖아도 여름방학이 끝난 뒤, 00의 학습태도나 과제 해결 모습이 1학기만 못해서 전화를 드리려다가 기다려주고 있었답니다. 그러니 밤 늦게라도 과제를 다 해결하도록 부모님도 같이 마음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2학년은 좋은 습관을 들이는 시기인데 벌써부터 게으름을 피우거나 핑계를 대는 버릇을 방치하면 3학년이 되어 사춘기가 되면 다잡기 힘들어집니다. 부탁드립니다."

아침독서를 마치고 숙제 검사를 하는 시간, 아이들 사이에서 작은 수런거림이 들려왔습니다. 내심으로는 다른 날보다 더 철저하게 숙제 검사를 하리라고 마음 먹었습니다. 다른 날과 달리 숙제를 펴는 속도가 매우 느렸습니다. 아무래도 수상하여 돌아보니 제대로 해 온 아이가 1/3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방학 때 쓴 일기의 날짜를 숫자만 고쳐 쓴 아이가 둘이나 있어서 화가 치밀었습니다.


"아니, 선생님이 모를 것 같아서 이런 짓을 했나요? 하지 못했으면 솔직하게 반성하는 게 더 낫지, 이렇게 선생님을 속이다니! 매를 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안 되겠어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때리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결국 매를 들고 말았습니다. 읽기 책 하루 한 쪽 쓰기는 다섯 줄 밖에 안 되는 것도 중간중간 빼먹고 일부러 쓰지 않았으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척하는 모습, 집에다 숙제를 두고 왔다는 변명, 5명의 아이들은 손바닥을 맞았습니다. 쉬는 날이 많아질수록 숙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아이들, 그것도 선생님을 속이는 지능범(?)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손바닥을 때렸습니다.


백신처방 하는 날은 선생님도 아파요

쉬는 날이 겹치면 숙제 검사 하는 일이 언제나 걱정입니다. 제대로 다 못한 아이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벌칙을 줘야 하고 잘해 온 아이들에게는 칭찬을 곁들이는 공정한 잣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명절에는 아예 숙제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으니 추석 당일만 숙제를 면해 주고 다른 날은 평상시와 같이 약간의 과제만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해오지 않은 않은 아이들은 기어히 숙제를 하게 합니다. 그것도 '사랑의 매'가 아닌 백신 처방을 받은 손으로 말입니다.

그대신 숙제를 잘해 온 아이들은 다른 공붓감으로 즐겁게 놀게 해줍니다. 못해 온 아이들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그런데 문제는 내게 발생합니다. 아이들에게 백신 처방을 쓴 날은 여지없이 내 머리가 아픈 겁니다. 내 속이 썩어서 스트레스로 머리가 아픕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수업을 진행하기 힘듭니다. 마음도 괴롭고 내 무능력에 자책까지 겹쳐지면 그 후유증은 여러 날이 가니 되도록이면 매를 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오늘처럼 아프게 백신처방을 내린 적이 없었기에 그 아픔은 더 컸습니다. 그렇다고 뻔히 나쁜 버릇이 들어서 게으름을 피우느라 해오지 않은 숙제를 적당히 훈계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면 더 큰 화를 부르게 됨을 너무나 잘 아는 나로서는 포기할 수조차 없는 외길입니다.

체벌을 반대하지만 아이들의 마음 속에 게으름의 암세포가 커 가고 있는데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을 외면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직면하게 됩니다. 한 두 시간 학습 진도를 포기하면서라도 기어코 숙제를 마치게 하고 손바닥 매를 들어야 했던 괴로운 시간을 잊지 않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제 겨우 2학년인데 벌써부터 잔머리를 굴리는 요녀석들 덕분에 어깨가 무겁습니다. 내 양심에 비추어 매맞을 각오를 하고 매를 들어아 하는 오늘 같은 날이 가장 괴로운 날이랍니다.

'아이들아, 제발 숙제 좀 잘해 오면 안 되겠니? 선생님 머리 아프지 않게 부탁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교닷컴, 전남인터넷교육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교닷컴, 전남인터넷교육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매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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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에는 사랑이 없다>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라> <쉽게 살까 오래 살까>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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