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를 든 도예가 "누군들 안 아깝겠어요"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에서 만난 박광천 명장... "작품은 꼼수가 아닌 원칙으로 완성"

등록 2011.09.28 17:46수정 2011.09.28 17:46
0
원고료로 응원
a

가마보기 도자기를 꺼내기 전 가마을 살피고 있다 ⓒ 이장호


가마와 함께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도자기축제

가마 앞에서 잠시 가마를 응시하던 도예가는 한 번 숨을 고른다. 예전의 어느 TV프로그램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서먹하게 "반갑다, 친구야!"라며 손을 내밀던 장면처럼 도예가는 가마 속의 도자기에 잠시 손을 얹었다가 놓는다. 좁은 가마의 입구를 통해 도자기가 하나씩 세상으로 나올 때 주변의 관람객들은 연신 탄사를 쏟아내지만, 정작 도예가는 예리한 표정으로 하나 둘 꼼꼼히 살필 뿐이다.


지난 27일 오후, 경기도 여주군 천송리 여주도자기축제 행사장의 전통가마에서 가마에 불을 댕긴 지 나흘 만에 아직도 뜨거운 열기가 가시지 않은 가마에서 도자기를 꺼내는 박광천 도예명장을 만났다.

a

작품감상 진사도자기 항아리를 꺼내들고 살피고 있다 ⓒ 이장호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몫이지만 정작 가마 속의 도자기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은 불과 바람의 몫입니다. 사람의 능력이나 정성이 부족하면 가마와 불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지요."

가마 앞에서 도자기를 꺼내는 날이면 삼십오 년을 도자기 만드는 일에 진력해 온 명장도 긴장이 되는 걸까. 박광천 명장의 조용한 말투는 마치 시험성적표를 받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조심스럽기만 하다.

a

도자기 꺼내기 도자기를 꺼내면서 꼼꼼하게 살펴본다 ⓒ 이장호


이번 가마에는 현란한 기교보다는 절제된 기형(그릇 모양)과 벽사(나쁜 기운을 막음)의 의미가 있는 진사자기(辰砂瓷器)와, 박 명장의 주특기인 생동감 넘치는 투계(닭싸움)와 경기도 여주의 풍경을 담은 진경산수를 그린 작품들이 탄생했다.

a

도자기 깨기 마음에 안드는 도자기를 망치로 내리친다 ⓒ 이장호


비슷해 보이는 도자기를 천천히 바라보던 박 명장은 이내 한 작품을 골라내더니 결국은 망치를 들어 힘껏 내리친다. 한 점, 또 한 점… 박 명장의 손에 이끌려 나온 도자기들은 이내 사금파리로 변해버리고 만다.


"누군들 안 아깝겠어요. (작품 제작에) 들인 시간과 정성을 생각하면 다 아깝지요"라는 박광천 명장의 말에는 자신에게 엄격해야만 세상에 떳떳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박 명장은 "아까운 마음에 내 마음에 차지 않는 도자기를 세상에 내놓는 도예가는 아무도 없다"며 "도예가에게 있어 도자기는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또 다른 나의 모습"이라고 강조한다.

흙을 빚고 그림을 그리며 도자기와 함께 살아온 지난 세월, 어느새 도자기는 박광천 명장에게 함께 놀아준 친구가 되었고, 애틋한 마음이 앞서는 자식이 되었다.

a

식히기 가마에서 갓 구워낸 도자기를 식히고 있다 ⓒ 이장호


"친구나 자식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친구나 부모는 없다"는 박광천 명장의 모습은 어느 특별한 도예가의 모습이 아니라 도자기에 천착하는 모든 예술가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꼼수가 판치고, 눈가림이 난무하고, 예술마저도 장삿속에 쓸려가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가마와 함께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몸과 마음으로 배운 원칙을 지켜가고 있는 도예가들.

a

운곡의 청자 여주에서 활동하는 운곡청자 권혁용 도예가의 상감청자 다기차림 ⓒ 이장호


아직도 이런 옛날식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잔치가 지난 24일부터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여주·이천·광주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연휴에는 도예가의 이야기가 가득한 남한강변의 여주도자기축제를 즐겨보심은 어떨는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남한강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남한강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여주군 #도자기 #박광천 #권혁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경기도 여주에서 지역신문 일을 하는 시골기자 입니다. 지역의 사람과 역사, 문화에 대해 탐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런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종영 '수사반장 1958'... 청년층이 호평한 이유
  2. 2 '초보 노인'이 실버아파트에서 경험한 신세계
  3. 3 '동원된' 아이들 데리고 5.18기념식 참가... 인솔 교사의 분노
  4. 4 "개발도상국 대통령 기념사인가"... 윤 대통령 5·18기념사, 쏟아지는 혹평
  5. 5 "4월부터 압록강을 타고 흐르는 것... 장관이에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