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 대통령 이승만>.
KBS
6·25가 터지자 이승만이 서울을 떠난 시점은 전쟁 발발 46시간 만인 6월 27일 새벽 2시였다. 그는 각료들과 함께 심야특별열차 편으로 남하했다. 그런데 <이승만 3부작>은 남하 직전인 26일 밤의 시점에서, "그때까지도 이승만은 피신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이승만이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려고 노력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어서 다큐는 이승만이 대전에 가서 국민들에게 서울 사수 방송을 했다고 간명하게 언급하고는 '한강다리 폭파 건'으로 성큼 넘어가 버린다.
터놓고, "이승만은 한국은행의 현금도 고스란히 두고 갔을 정도로 허겁지겁 도망쳤다"라고 말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상적인 다큐멘터리라면 최소한 '이승만이 대전에서 방송을 보내면서 마치 서울에서 방송하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점' 정도는 짚었어야 하지 않을까? 이어진 '한강다리 조기 폭파 건'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이승만 정부의 실책이다. 그런데 이미 잘 알려진 실책을 굳이 상세하게 다루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이승만에 대해 비판할 것은 비판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고 동시에 정작 비판해야 할 것을 누락하기 위한 시간 끌기가 아니었을지.
정상적인 다큐멘터리라면 6·25 이전에 이미 수만 명 이상이 죽은 제주의 4·3항쟁을 말했어야 하고, 한강다리 폭파를 말해야 할 시간을 쪼개서 이승만 정부가 남하하면서 자행한 수원, 대전 등지의 좌익 및 민간인 학살과 보도연맹 대학살을 지적했어야 옳다. AP통신은 한국전쟁 초기 학살당한 민간인이 최소 10만 명일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당시 정치범은 3만 명에 불과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런데 <이승만 3부작>은 학살에 관해 역시 알려질 대로 알려진 '거창민간인학살사건'만을 거론하면서 그것도 '체계적으로 훈련 받지 못한 병사들의 우발적 소행'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이승만은 없었다, '왜곡된 이승만'과 '과장된 이승만'이 있을 뿐<이승만 3부작>은 이승만이 청년 시절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활약한 일을 전하면서, 이 만민공동회의 노력으로 러시아가 조선에 대한 각종 이권을 포기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왜곡 수준을 넘는 것이다. 러시아의 이권 포기는 만민공동회 때문이 아니라 러일전쟁 패배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승만 3부작>은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나 조선의 독립을 청원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고 말한다. KBS는 이것을 첫날 방영 전에 뉴스로 보도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승만을 부각했다. 물론 이승만이 1904년 도미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쿠데타에 가담해 감옥에 있던 이승만을 꺼내주고 도미를 주선, 지원한 것은 민영환·한규설 같은 구한말의 우국충신들이었다. 그런데 <이승만 3부작>은 이 거사를 마치 이승만 혼자 해낸 일인양 말한다.
이어서 <이승만 3부작>은 이승만이 프린스턴대학원 시절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윌슨 총장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말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일까? 당시 이승만은 김규식이 파견된 파리회의에 자기가 가려고 했다. 그가 파리회의의 한국대표를 자임하고 나서자 대한민국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이승만을 믿고 한국 대표 자격을 부여한다.
하지만 윌슨 대통령의 각별한 제자라던 이승만은 끝내 프랑스 행 비자도 받지 못한다. 파리회의 참석 기회를 놓친 이승만은 난데없이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 위임통치를 건의한다. 1919년 3월 19일자 <뉴욕타임스>에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파리회의에 참석하는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승만은 한국은 당장 독립될 가망이 없고 또 독립된다고 하더라도 자치능력이 없으니 미국이 주관해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한국을 당분간 통치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제출한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 3부작>은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은 장차 독립으로 나아가기 위한 단계적 조치였다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승만이 상해임시정부에서 불신임되고 급기야 탄핵까지 이르게 된 것은 바로 이 위임통치론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이동휘)이에 대해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는 이상한 논리로 거부했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를 팽개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임시정부로서도 현장에 근무하지 않는 그를 더 이상 대통령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승만 3부작>은 임시정부의 파벌싸움 때문에 이승만이 집무를 하지 못해 떠난 것처럼 말한다. 또 애초 상해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초청했던 것도 은근히 그에게 미주의 독립자금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역에서 풍찬노숙했던 우국지사들을 싸잡아서 폄훼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