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다니다 월급 130만원... 행복합니다

[비정규직 분투기①] 공장에서 학교로... 비정규직 삶 속의 작은 기쁨

등록 2011.10.22 12:22수정 2011.10.22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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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정문 앞 매주 수요일 현대자동차 정문 앞에서는 '불법파견 정규직화' 하지않고 있는 회사에 항의 농성을 하고 있는 중이다. ⓒ 변창기


2000년 7월 초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하청업체에 들어가 일했습니다. 시급 2100원 받고 일하기 시작해서 2010년 3월 정리해고 당하기 전까지 시급 4800원 받았습니다. 하루 10시간 맞교대로 돌아갔고 토요일 특근 시엔 오후 5시까지 출근해서 일요일 오전 8시까지 작업했습니다.

처음 몇 년간 급여 외에 아무것도 없다가 2005년 여름부터 비정규직노조 운동이 일어나면서 급여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급여는 정규직의 절반 수준이었으나 그나마 상여금이 600% 있어서 한 달 까먹고 다음 달에 메우는 방식으로 가족이 먹고는 살았습니다.

하청업체에 들어갈 때만 해도 업체 소장이 '평생직장' 운운하기에 그 말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몇 년도 안 되어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도 모르게 업체가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10여 년간 3번이나 업체가 바뀌었습니다. 처음과 두 번째에는 업체가 바뀌어도 저의 근속 년수를 인정해주더니, 세 번째 업체 바뀔 때는 강제퇴직 처리하면서 신입으로 조정해버렸습니다. 어처구니없더군요. 그래도 어쩝니까? 가족이랑 먹고살려면 불만이 많아도 다녀야지요.

2005년 이후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생기면서 정규직 노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처우개선을 신경써주기 시작했습니다. 임금도 정규직의 70% 수준으로 오르기도 하고, 선물도 비누 한 상자 주던 것을 정규직의 절반 수준으로 1년에 2회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저도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기대로 비정규직노조 활동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관리자는 우리 집에 직접 찾아와 아이들에게 용돈까지 줘가며 노조활동을 중단하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현대차가 분명히 불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흔들릴 수 없었습니다.

2009년 가을 무렵부터 일터가 술렁였습니다. 업체가 또 바뀐다고 했습니다. 2010년 1월부로 다른 업체로 넘어간 저에게 소장은 말했습니다.

"계속 일하고 싶으면 노조 탈퇴해야 합니다."


저는 계속 일하고 싶어서 노조를 탈퇴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3월 15일 저는 정리해고되었습니다. 계속 다니게 해주겠다 할 때는 언제고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해버리다니…. 1년 동안 라인 공사를 새로 하는데, 정규직은 1년간 유급휴직을 주고 우리 비정규직들은 모두 정리해고해버린 것입니다.

위로금으로 고작 1개월치 기본급이 전부였고, 6개월 동안 고용보험이라도 타먹고 싶으면 사직서에 서명하라 했습니다. 그거라도 받아서 가족과 먹고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맥없이 퇴직서에 서명을 해주고 정리해고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엔 별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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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심은 다알리아가 꽃피우다. 학교에서 씨앗을 심고 싹을 틔워 꽃이 피기까지 6개월이 흘렀습니다. ⓒ 변창기


공장에서 학교로... 계속되는 '비정규직' 인생

가족 생계를 위해 벌어먹고 살려고 이 일 저 일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아는 분의 소개로 초등학교 시설관리 노동자, 이른바 '소사'로 들어가 일하게 되었습니다. 일당제였습니다. 하루 5만3000원 정도 되었습니다. 오후 5시가 되면 퇴근하는 일과였지만 저는 1시간 정도 더 일찍 출근했습니다.

"좀 일찍 출근해서 운동장 쓰레기 좀 주워주세요."

저는 학교를 한번 돌아보고 놀랐습니다.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저도 자식이 둘이다보니 운동장서 뛰어노는 학생들이 남달라 보였고 '내 자식이 뛰어놀 운동장을 깨끗하게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6개월 계약직이지만 제가 있을 동안은 '쓰레기 없는 학교'를 한번 만들어보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학교에선 "일주일에 한두 번만 주워달라"고 주문했지만 저는 매일 아침이면 쓰레기 봉투 하나 들고 운동장 곳곳을 다니며 남김 없이 쓰레기를 주워 담았습니다.

제가 주로 하는 일은 학교 시설관리입니다. 본래는 교육청에서 시설관리 공무원을 학교로 보내주어야 하지만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보내주지 않아 학교장 직권으로 비정규직을 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오기 전까지는 정규직 시설관리 공무원이 제가 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운동장 쓰레기를 줍고 나면 인쇄실에서 문서를 인쇄하는 일을 합니다. 또, 행정실에서 시키는 일도 하고 각 학급 선생님들이 해달라는 일도 합니다. 화단과 화분 관리도 합니다. 이 일 저 일 하다보면 하루가 금방 가버립니다.

점심시간은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입니다. 학생들이 급식을 먹는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습니다. 제 일당에 밥값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하루 일당을 한 달간 모아 월급으로 주는데, 그 일당에서 밥값만큼 공제 합니다. 4대 보험도 적용됩니다. 비정규직이라 일당 외에 아무런 수당이 없습니다. 월급은 150만 원 정도 되는데 4대 보험과 밥값을 공제하고 나면 130만 원 안팎 정도 되더군요.

지난 4월 초부터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해서 10월 초에 6개월 계약이 끝났습니다. 계약을 연장해서 6개월 더 일할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일자리 구해야 할지 전전긍긍 하고 있을 때, 계속 일해도 된다고 행정실장이 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내년 4월 초까지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달 월급 130만 원...그래도 공장보다 낫습니다

공장에 다닐 때는 한곳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라인 작업이다 보니 쉬는 시간 외엔 화장실조차 갈 수 없었습니다. 공장 안은 언제나 기름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검은색과 회색 빛 속에서 하루 종일 보냈습니다. 하루 종일 쇠붙이를 만지다 보니 마음마저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혼자만 일해서 다른 사람이랑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 정규직이라 가까이 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차별과 차이 속에서 지내는 게 힘들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했었습니다. 그렇게 10여 년 일하다 보니 머릿속까지 회색과 검은색으로 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몸엔 골병 증세가 생겼습니다.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담도 결리고.

6개월 넘긴 학교 일은 제 적성에 잘 맞았습니다. 회사에서 일할 때는 회색과 검은색밖에 안 떠 올랐는데 학교서 일하다 보니 초록색과 형형색색 무지개 색이 떠오릅니다. 화단 일을 하면서 꽃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고요. 봄에 다알리아 씨앗을 구해 시범 삼아 심어보았는데 새싹이 돋아오르고 커져서 예쁜 다알리아꽃이 피는 걸 보고 많이 행복해하기도 했습니다.

공장 안에서 일할 때는 몰랐던 자연을 가까이 하니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요즘은 가을인지라 피어났던 꽃이 지고 시들어버린 꽃나무를 처리하느라 힘들지만 그래도 재밌습니다. 교실에서 학생들이 책상이랑 의자랑 들고 와서 고쳐달라 하는 것도 재밌습니다. 인쇄 작업도 힘들지만 재밌습니다. 아침마다 쓰레기 줍는 일도 가끔은 힘들지만 쓰레기 없는 운동장서 학생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 꼭 내 자식이 뛰어노는 것 같아 흐뭇해집니다.

"변 주사 온 뒤로 학교가 깨끗해졌어요. 다른 학교 교장이 우리 학교 방문해 돌아보고 학교가 많이 깨끗하다는 칭찬을 해서 기분 좋아요. 다 변 주사가 일을 잘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교장 선생님이 저를 불러 그런 말을 하면 기분이 참 좋아집니다. 고생 많다며 좀 쉬면서 하라고 선생님들이 한마디씩 던질 때 기분이 좋습니다. 가끔 작은 빵 하나지만 고맙다며 주는 선물을 받을 때 흐뭇합니다. 지난 한가위 때 여러 선생님들이 선물을 주셨습니다. 양말이었지만 마음이 담긴 그 선물은 대기업 하청업체에서 주는 10만 원 넘는 선물보다 저를 더 행복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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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한별이라는 여학생이 쓴 편지글 ⓒ 변창기


이렇게 예쁜 아이들 보며 오래 일하고 싶어요

"아저씨,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어느 날부터는 3학년 학생들 네댓이 몰려들어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오전엔 인쇄를 하고 오후엔 화단 작업을 주로 하는데, 오후 2시쯤에는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집으로 갑니다. 먼저 말을 걸기에 몇 마디 대답해주었더니 요즘은 매일같이 찾아와 아이스크림 사달라 떼를 쓰고 갑니다. 그런데 그중 한 여학생이 어느 날 저에게 편지를 한 통 전해주고 갑니다.

"이거 아저씨 주려고 쓴 거예요. 보세요."

참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후 저는 여학생이 준 편지를 열어보았습니다. 거기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아저씨 그동안 아이스크림 사달라 해서 미안해요. 앞으로는 아이스크림 사달라 안 할 게요. 우리 학교 깨끗하게 청소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5명의 아이 중 그 아이는 항상 뒤에 서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당당하게 떼를 썼지만 한별이는 뒤에 서서 가끔 한번씩 "아이스크림 사주세요"라고 부끄럽게 이야기할 뿐이었습니다. 그 여학생이 저에게 앞으로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출근하면서 '설레임'이라는 아이스크림을 1000원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정성 들여 답장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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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 정성들여 쓰려고 봉투를 여러개 버렸습니다. 잘 못 만들 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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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 한별이 학생에게 보낸 답장 ⓒ 변창기


그날 오후 또 그 학생들이 와서 아이스크림을 사달라 했습니다. 저는 한별이를 불러 아이스크림과 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한별이는 다른 학생들이 떼를 쓰고 있을 때 한쪽에서 편지를 가방 안에 넣고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공장 안이라면 도저히 생기지 않을 일이 학교에선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변화무쌍한 학교 일이 참 좋습니다. 하지만 이제 6개월 더 연장되었을 뿐입니다. 내년 4월이면 또 이곳을 떠나야하나 노심초사하며 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년 4월이 되기 전이라도 만약 교육청에서 정규직 시설관리 공무원을 발령내버린다면 저는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이렇게 예쁜 학생들이 즐겁게 뛰어놀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할 생각입니다.
#공장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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