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서 벌어지는 투쟁들
(위 행사는 기사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정진세
창작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연극이 절정이거나 이를 지나던 시기에 태어났고, 점점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한편, '시장' 의 관점에서 연극이 문화상품으로 급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지요. 그러니까 이들에게 공연이란 지켜내야 할 정신이면서 동시에 상품화해야하는 재화입니다. 이들은 지금 재능 있는 또래 동료들이 방송과 영화에서 활약할 때 소수의 동지들과 고군분투하는 중입니다. 386세대 연극인이 그 윗대의 선배 연극인들과 많은 동료들을 갖고 있는 것과는 상황이 조금은 다르지요. 그나마 소수의 동료들도 거의 다 서바이벌을 위한 경쟁 상대입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젊은이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들은 예술 활동의 참여자 혹은 종결자로 존재해야만 하는 관객이기 보다는 그저 떠돌이에 가깝습니다. 그들에게는 상업적인 공연은 너무 비싸고, 미학적인 공연은 너무 어렵다는 이유도 있겠습니다. 소통이 어려운 것이지요. 지금이 공연들이 관객을 너무 모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학로' 의 '대학' 은 지성과 젊음의 '대학생' 을 명시하는 게 아니라 창작자의 주요 직업인 '대학' 교수이자, 관극의 주요 목적인 '대학' 과제를 의미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경쟁적이고 억압적인 대학생들의 상황이 대학로에서도 재현되기에 '대학로 맞다' 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혜화동의 지리적 역사나, '대학로' 명칭의 기원을 살펴볼 때, 이 장소는 최고 지성들의 산실이었으므로 엘리트 중심으로 가는 것이 '전통적으로 옳다' 고 할 수도 있겠지요. 씁쓸한 농담이었습니다만, 이제는 과연 대학로가 다양성, 자발성 등의 요새 젊은이들 감성을 잘 표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됩니다. 결국 여기저기도 속하지 못한 공간 없는 주체들은 공간 혹은 자본의 지원을 기다리거나 자발적 (혹은 타의적으로) 대학로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겠지요. 그 기다림의 시간은 결국 내면화 혹은 자숙의 기간으로 되돌아옵니다. 원인은 구조에 있을 터인데, 마치 자기 자신이 원인인 냥 내공부족을 탓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공연은 과연 투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연극판에서 세대간의 투쟁이 '지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랫' 세대는 '윗' 세대를 거스르지 못하며, '윗' 세대는 '아랫' 세대에게 본보기가 되지 못합니다. 실상 젊은이들은 상업권력을 향해 투쟁해야 할지, 문화권력을 향해 투쟁해야 할지 혹은 기성 세대를 향해 소리를 질러야 할지, 다같이 어려운데 싸우는 게 맞는지 참 난감합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투쟁은 결국 무분별한 상업적인 움직임에 반대하고, 기성의 미학에 맞서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인정투쟁일 것입니다. 발언권을 달라는 공간 투쟁일 수도 있겠지요.
물론 투쟁에 앞서 선행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겠지요. 공연이 투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즉, 과연 나는 '공연' 때문에 내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혹은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누군가와 맞설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왜 공연을 하는가, 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나서도 절실함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왜 투쟁이 필요한지도 알 수 있겠지요. 그 질문은 다시 상대에게 던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왜 연극을 하는가. 연극을 출세의 수단으로, 입신의 수단으로 사용하지는 않는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으로 연극이 도구화된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