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미용실보다 '구 원장님네'가 더 좋더라

주민들 이어주는 사랑방, 6년 단골의 우리 동네 미용실

등록 2011.10.21 18:36수정 2011.10.2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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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동네에 살고 있다. 오래 머문 만큼 사람도, 동네도 변해가는 모습을 쭉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려왔다. 그런데, 내게 유일하게 공백으로 남은 기억이 있다. 바로, 동네 사람들이다.
10년 사이, 골목 어귀에서 사람들이 사라졌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동네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기 힘든 적막한 곳이 되어버렸다. 부모들도 자기 생활에 바쁘다보니 잠만 자러 집에 들어간단 이야길 한다. 나 역시 아파트로 이사한 뒤로는 앞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이사철에도 떡이 오고 가는 모습을 보기 힘들 정도니 말 다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이웃 간 교류 단절'이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 사랑방 구실 톡톡히 하는 '구 원장님 미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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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원장님의 미용실 풍경. ⓒ 박주희


교과서에선 도시화로 이웃 간 교류가 단절됐다고 설명만 하고 그쳐도 되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 삭막해진 동네 사람들 사이를 다시 이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우리 동네에는 그리웠던 사람냄새를 실컷 맡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구 원장(41)님의 미용실이다.

미용실을 오고 가며 만난 이들이 다리를 건너 아는 사이가 되고, 서로 몰랐던 이들은 새로운 동네 주민들을 사귀면서 왕래하는 이웃이 되곤 한다. 개업 7년째인 이 작은 미용실이 주민들 간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셈이다. 실제로 17일
미용실에서 만난 두 명의 손님 역시도 미용실에서 인연을 맺은 사이라고 했다. 서로 얼굴도 모르고 지나쳤을 사람들이 미용실을 통해 얼굴을 익히게 되고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로 발전해 나간다.

매번 머리 손질을 하러 가던 곳을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방문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법한 골목 한 편에 위치한 소규모 미용실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까만 소파와 테이블이 바로 보이고 그 앞쪽엔 벽 전체를 메운 거울과 미용실 의자 세 개가 놓여 있다. 입구쪽에는 조그마한 정수기와 일회용 커피믹스가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직접 커피를 타서 건네주시는 구 원장님의 손길에 따뜻함이 밀려왔다.


친구들은 최신 유행 퍼머나 컷을 찾아 대형 프랜차이즈 미용실로 가곤 했지만 나는 '구 원장님'만 찾았다. 6년 전, 처음 미용실을 찾았을 때도 고등학생인 나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면서 어색함을 풀어주셨던 분이기에 지금까지도 이모와 조카처럼 친근하게 지내고 있다. 그래서 집에서 입고 있던 차림으로 가도 민망하지 않다. 내가 언제 어떤 머리를 했고, 머리카락 상태가 어떤지도 훤히 알고 계시니 머리 하기 전에 머릿결이 상하지 않는 방향으로 스타일을 결정해주시곤 한다. 다른 미용실 갈 마음이 안 생기는 건 당연지사다.

영유아부터 80대까지 거리낌없이 놀러오는 곳

미용실에서 머리에 천을 두르고 있던 중년 여성은 편안해서 구 원장님을 찾는다고 했다.

"미용실에 오면 편안하게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눌 수 있어 좋죠. 특히 미용실에 온 사람들끼리 공통 화제가 생기다보면 자연스레 유대감도 형성되고요. 시어머니 이야기에서부터 아이들 교육이야기까지 대화 주제도 다양해요. 아, 원장님이 저희 어머니 이야기도 잘 들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어르신들은 어디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곳이 없는데 아주머니는 매번 잘 들어주신다고 하시더라구요."

나 역시도 굳이 머리를 다듬지 않더라도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어르신들을 자주 보았다. 편하게 앉아서 아주머니랑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다 가신다. 엄마 손을 붙잡고 오는 3~4살 아이들은 놀러온 어르신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기도 한다. 미용실에 가서 3-4시간 정도 파마나 스트레이트를 하다 보면 아이 엄마와 어르신들이 나누는 대화를 자연스레 듣게 된다.

"애기 몇 개월이에요? 고 놈 참 귀엽네."
"한창 말썽부릴 때라 힘들지요. 한시도 가만 있질 않으니까요."
"그래도 그 때가 좋은 거야. 애기들 다 크면 같이 밥 먹을 시간도 없는 걸."

시골 인심까지 훈훈하게 퍼지는 미용실... 공동체 회복의 시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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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에 오면 꼭 한 잔씩 타서 먹는 커피. 굳이 머리를 자르지 않더라도 커피 마시면서 아주머니와 대화하는 이웃들이 많다. ⓒ 박주희

비단 따뜻한 대화만 오고 가는 게 아니다. 미용실을 통해 제철 음식이나 김장 재료들을 공동구매하기도 한다. 미용실 단골 할머니들이 시골에서 빻은 고춧가루나 갓 수확한 매실 등이 있으면 구입 의사를 물어보고 주문해주신다고 한다. 실제로 언젠가 머리를 자르러 갔을 때, 미용실 소파 밑에 빨간 고추가 가득 든 자루를 본 적이 있다. 미용실이 사람뿐만 아니라 시골의 인심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주민들이 열쇠나 짐을 맡기고 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택배 배달원에게 착불 요금을 대신 내줄 정도다. 미용실에 다니면서 이런 대화를 5~6번은 들었던 것 같다.

"혹시 택배 왔어?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네."
"뭘요, 이 정도 가지고. 여기 있어요."

번거로울 법도 한데 아주머니는 미용실이 편하고 오래 되다 보니 믿을 수 있어 그런 거 아니겠냐며 이웃 간에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라고 하신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잊고 살았던 동네의 따뜻한 인심이 다시 살아난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찼다.

며칠 전 가까운 친척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머리 손질을 받기엔 시간이 애매해 미용실행을 포기했었다. 그걸 기억하고 계셨는지 구 원장님은 "결혼식 잘 다녀왔어요? 머리는 어떻게 했어요?"라고 물으신다. 그 어떤 안부보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말 한마디에 동네 네트워크의 참맛을 더욱 전파하고 싶어졌다.

당장 프린터 잉크가 떨어졌을 때, 갑자기 정전이 됐을 때, 직접 가꾼 배추로 김장을 담그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뻗을 수 있는 게 동네 이웃 아니던가. 공간과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이웃과 그 이웃들이 신뢰로 다져가는 네트워크야 말로 잃어버린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란 생각이 든다. 구 원장님의 미용실에서 느낀 '공동체의 따스함'이 많은 동네에 퍼질 날을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박주희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단 '오마이 프리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박주희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단 '오마이 프리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네 미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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