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에 '도끼질'을... 하지만 행복한 이유

[서평] '광고장이'가 읽은 인문학, <책은 도끼다>

등록 2011.10.26 10:39수정 2011.10.2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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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표지 ⓒ 북하우스

아침 밥상에 올라온 콩나물국. 씹을 때마다 줄기가 톡톡 터지면서 입안으로 퍼지는 물기가 싱그럽다. 버스정류장에서 본 은행나무. 나란히 서 있어도 성질 급한 놈은 벌써 노랗게 숨이 넘어가고 느긋한 놈은 아직 초록이 성성하다. 거미줄에 맺힌 이슬의 아름다움에도 눈길이 간다. 무심히 지나쳤던 모든 것에 눈길이 간다.

김훈과 조르바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자 모든 것이 새롭고 놀랍다. 감동을 잘 받는다는 것은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한다. <책은 도끼다> 제목부터 살벌한 이 책은 이렇게 무심했던 일상에 작은 파문을 가져왔다. 그런데 도끼를 생각하면 무언가를 찍어버리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날이 바짝 서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 무엇을 찍을 것인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저자는 고독과 불안이라는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을 잘 표현한 <변신>을 쓴 카프카의 말을 들려준다. 즉, 책은 얼어붙은 우리의 감성을 깨뜨리고 잠자던 세포를 일깨우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살벌함과 달리 저자는 아주 조곤조곤하고 친밀감 있는 목소리로 책 제대로 읽는 법을 이야기한다. 저자 박웅현은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등 인문학적 깊이가 있는 광고카피로 유명한 광고인이다.

저자는 자신이 쓴 카피의 바탕이 책이었고, 책이 얼어붙은 자신의 감성을 깨뜨리고 잠자던 세포를 깨우는 도끼였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의 머릿속 도끼질의 흔적을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진행한 강독회를 책으로 묶은 것이 바로 <책은 도끼다>이다.

이철수에서 시작하여 김훈과 알랭 드 보통, 오스카 와일드, 고은, 미셸 투르니에, 밀란 쿤데라, 니코스 카잔차키스, 김화영, 카뮈, 톨스토이, 손철주, 오주석 등 스물네 명의 만만치 않은 대가들의 작품들을 '들여다보기'라는 저자 특유의 독법으로 해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살면서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읽었다'에만 방점을 찍었을 뿐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들었다. 저자는 그렇게 내 머리에 도끼질을 했다. 이번엔 그의 도끼에 제대로 찍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

박웅현의 인문학 독법, '천천히 들여다보기'

첫 번째 추천 책은 판화로 시를 쓴다는 이철수의 판화집이다. 이철수의 판화 그림은 간결하고 단아한 그림에 선가(禪家)의 시구 같은 짧은 글이 어우러져 현대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저자는 이철수의 책이 평소에 못 보던 것을 보게 해주고, 인간 중심의 시선을 돌려 자연과 만물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꽃 보내고 보니,/ 놓고 가신/ 작은 선물/ 향기로운 / 열매(본문 24쪽)

누구나 꽃이 지면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꽃이 두고 간 선물이라는 이철수의 시선. 저자는 이 판화 그림을 본 후로는 열매를 보게 되면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아, 이 자리에 꽃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본문 32쪽)

시보다도 아름다운 이 구절은 최인훈의 <광장>에 나온다. 저자는 최인훈이 소설을 시처럼 쓴다고 감탄한다. 그리고 최인훈과 완벽히 반대 시선에 서 있는 김훈을 이야기한다. 유려한 최인훈의 문장을 읽다 사실적인 글쓰기를 추구하는 김훈의 문장을 읽으면 마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지하 20층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현기증을 느낀다고 한다.

김훈의 글은 한 문장 한 문장을 꼭꼭 눌러서 읽어야 한다. 줄을 치고 또 쳐도 마음을 흔드는 새로운 문장들이 넘쳐나는 것이 김훈의 글이다. 저자는 김훈이 미쳤다고 말한다. <자전거 여행>에 쓴 된장과 인간과 냉이의 삼각 치정관계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기막힌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봄이 되어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면 나도 냉이와 된장 사이에 낀 삼각 치정관계의 주인공이 될 터이다.

같은 꽃을 보아도 '아, 예쁘네 '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마음을 열고 물어보고 따져보고 알아보고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김훈이 그렇다. 김훈은 삶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서 발견하라고 한다.

현재를 즐겨라, '카르페 디엠'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본문 192쪽)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카르페 디엠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중해 문학의 특성 중 하나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현재에 집중하라. 순간을 살아라'라는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 구절에서 유래했다. 실존주의 문학에서 많이 나타나는 철학이기도 하다.

카르페 디엠을 실천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이다. 조르바는 물레질에 거추장스럽다고 손가락을 자르고, 산두리(악기)를 배우기 위해 모아둔 결혼자금을 털어 산두리를 사서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조르바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로운 감탄의 대상이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그는 소리친다.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본문 197쪽)

지나간 어제를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는 일 따위는 조르바의 머릿속에 없다. 순간을 사랑하고 모든 것에 감탄하는 매력적인 인물이 조르바이다. 오늘이 행복하면 평생이 행복하다. 이것을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은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참을 수 없이 무거운' 밀란 쿤데라

1990년대 초 밀란 쿤데라는 일종의 유행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지나가고 난 자리를 밀란 쿤데라가 이어받았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제목이 보이도록 손에 들고 다니던 장식품의 일종이기도 했다.

그런데 들고 다니기엔 가벼웠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읽고 이해하기에는 무거웠다. 아무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읽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에 쫓기며 마지막 장을 덮었던 기억이 난다. 저자 역시 '읽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읽게 되었지만,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밑줄 쳐지는 양이 많아지고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학창시절 어렵다고 느껴졌던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박웅현이라는 사람의 설명을 통해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무거움과 가벼움, 의미와 무의미, 영혼과 육체, 운명과 우연, 영원과 순간 같은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문제를 토마스와 테레사, 사비나와 프란츠 네 명의 사랑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성과 사랑, 정치와 역사, 신학과 철학까지 아우르고 있는 이 소설이 주는 감동의 무게는 제목과 달리 결코 가볍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책은 도끼다>를 통해 저자는 스물 네 명의 작가와 마흔 두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언급한 책을 모두 따지면 예순네 권이다. 이 많은 책들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말한다. 책을 왜 읽는냐, 읽고 나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게 많아지고, 인생이 풍요로워진다고 한다.

저자는 어떻게 하면 자동차 달리는 속도가 아니라 잔디가 자라는 속도로 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숨 쉬는 속도가 바닷가 파도치는 속도와 한 호흡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은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지만 정작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에 걸려 있었다는 시구처럼 행복은 먼 데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노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톨스토이와 카뮈, 김훈과 조르바의 안내를 받아 생겨났다고 한다. 박웅현의 도끼질은 즐겁고 유쾌하고 행복하다. 이 가을, 책이라는 도끼로 머릿속 감수성을 깨보는 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책은 도끼다> 박웅현 씀, 북하우스 펴냄, 2011년 10월, 348쪽, 1만6000원


덧붙이는 글 <책은 도끼다> 박웅현 씀, 북하우스 펴냄, 2011년 10월, 348쪽, 1만6000원

책은 도끼다 (양장 특별판)

박웅현 지음,
북하우스, 2011


#책은 도끼다 #박웅현 #카르페 디엠 #조르바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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