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우선 두 사람은 색안경을 좋아한다. 언론에 보도된 카다피는 늘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박정희도 보도 사진이나 책에 진한 색안경을 쓴 모습으로 캐릭터화 돼 있다.
독재권력자와 색안경이 어떤 상관관계라도 있을까.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살펴보는 자신의 눈초리가 드러나지 않게 감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특히 박정희는 정보장교 출신이어서 본색을 위장하려는 잠재의식이 있을 것이다.
또 대형 토목건설 공사를 벌인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그런 토목공사가 영웅주의적 카리스마를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흔히 독재자들이 장기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큰 일을 벌인다. 박정희는 196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그리고 카다피는 리비아의 사막지대에 지중해의 물을 끌어들이는 대수로 공사를 벌여놓았다. 이 공사는 나일강의 수량을 200년 동안 공급할 수 있는 양인 35조 톤에 이르는 물을 지중해 연안으로 송수, 한반도 면적의 약 6배에 해당하는 3억6800만 평에 이르는 사막을 옥토화 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세계 최대규모의 이 토목공사는 우리나라의 동아건설이 맡아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거대 토목공사와 독재권력은 상당한 상관 관계가 있다. 고대 중국의 진시황이 중국 내륙에 운하를 건설한 것도 그런 예 중 하나다. 물론 우리의 경부고속도로나 고대 중국의 운하, 그리고 리비아의 대수로가 경제적 기여를 한 것에 대해서는 부인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거기에는 얼마나 많은 국민의 피땀이 들어가야 하는가. 독재자가 그것을 장기집권의 명분으로 이용하는 것이 문제다.
세 사람 모두 개발독재자라고 할 수 있지만 국가 위상을 높인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지 결코 지속적인 국가 발전을 가져올 수가 없다는 점이 문제다. 더구나 국민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가혹한 탄압과 퇴행적 정치제도로 타락하는 공통점이 있다.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하는 것이다.
박정희와 카다피는 닮은 꼴 독재권력 카다피와 박정희가 닮은 꼴인 것은 역시 민심의 이반으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다. 누구의 총에 맞아 죽었느냐는 것은 직접적인 사인에 해당하지만 궁극적인 원인은 장기독재에 대한 국민의 항거였다. 카다피도 붙잡히는 순간 경호원이 총을 쏘아 죽였다는 얘기가 보도되기도 했다. 민중의 손에 의해 처참해지기 전에 차라리 측근이 처리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일까.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서도 그런 생각이 묻어나 있음을 느낀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권총으로 살해한 10·26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은 1979년 12월 4일 첫 공판을 시작했다. 사건 발생 후 합수부가 수사를 개시한 지 39일 만에 재판이 열린 것이다. 1심 재판은 12월 18일 9회 공판으로 피고인들에 대한 사실심리와 증인신문, 증거조사 등을 끝내더니 20일 선고까지 초고속으로 치달았다. 김재규와 박선호는 물론이려니와 청와대비서실장 김계원과 중정부장 수행부관 박흥주 대령 등 7명 모두 사형이었다. 이 중 김계원은 나중에 무기로 감형된다.
재판이 시작된 지 불과 16일 만에 선고까지 모든 절차를 마친다는 것은 사법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속도전이었다. 대통령 살해라는 엄청난 사건임을 생각하면 법조인이 아니라도 누구든지 혀를 내두를 만큼 정신 못차리게 밀어 붙인 재판이었다.
항소심인 고등군법회의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 1월 22일, 23일, 24일 연달아 3회 공판을 연 뒤 28일 선고해 버리고 말았다. 10·26 재판은 1심, 2심, 3심이 형량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재판이 처음부터 이미 정해 놓은 결론을 실천하기 위한 요식행위가 아니었느냐는 시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거기다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이 나오자 24일 김재규와 그 부하들을 함께 처형해 버리고 만다. 문명사회의 성찰과 고민이 눈꼽만큼도 담기지 않은 보복조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친위대 출신인 전두환 노태우의 하나회가 내란을 일으켜 국가권력을 찬탈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김재규의 변호인단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이 구명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내란집단의 조치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정치범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여론이 반영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