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미FTA 날치기 비준 처리 규탄 집회에 참석했던 시민들이 가두행진을 시작하자 경찰이 살수차를 동원해 물대포를 쏘고 있다.
권우성
1990년대 중반 이후 특히 2000년대 이후 바뀌기 시작한 한반도 주변의 안보환경 때문에 나는 한미FTA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관료들과 정치인들과 통상대표들이 한국의 국익을 최대한으로 지킬 수 있는 결과를 들고 올 것으로 기대했고 또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한미FTA 국회비준을 전후해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협상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보면(그리고 한국의 관료들이 한국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다는 위키리크스의 폭로 내용을 참고하면),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FTA인지 심각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ISD나 역진방지조치 등 이른바 독소조항들에 대해 정부는 반대론자들이 지나치게 극단적인 상황만 가정해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고 한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따져봐야 하는 과학자로서 나는 고위관료들의 이런 태도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상대성이론이 뉴턴역학을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은 1.75초에 불과한 별빛의 휘어짐 때문이었고, 100년이 지난 지금은 빛보다 겨우 60나노초 빨리 비행한 중성미자가 현대물리학의 근본을 위협하고 있다.
이번 한미FTA는 기본적으로 기업들에게 한국정부와 최대한의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협정이기 때문에, 정부의 초월적인 힘이 제거된다면 '지나치게 극단적인 상황'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관료들이라면, 반대하는 전문가들의 지나치게 극단적인 상상력을 탓하기 전에 지나치게 극단적인 상황에도 대처할 방법을 응당 마련해야 하는 법이다.
이렇듯 논란이 확산되면서 또 하나 확인된 사실은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한미FTA를 둘러싼 토론과 이견조정 및 사후대책 논의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은 4년 동안 의회가 FTA의 이해당사자들과 모여 피해를 최소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모색한 뒤에 의회비준을 마쳤다.
한국에서는 협정문조차 제대로 읽어본 국회의원이 거의 없을 정도로 협정에 대한 연구와 이해 조정에 들어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최근의 어느 TV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정부입장을 공공연히 편드는 토론진행자가 프로그램 말미에 "ISD만 해도 이렇게 토론할 게 많고 의견차이가 큰 줄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실토하기도 했었다. 반대론자가 제기하는 독소조항은 이것 말고도 무려 10여 개나 더 있는데, 과연 우리가 선진국들과 FTA를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성찰해 본 적도 거의 없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한나라당이 지난 22일 마치 군사작전 벌이듯이 속전속결로 비준안을 날치기한 행태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정면으로 위배한 야만적인 폭거에 다름 아니다. 인감도장을 국회의원들에게 맡겨 둔 것과도 같은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계약서 문안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장 관리하는 대리인이 자기만 믿으라며 우격다짐으로 주인 몰래 도장 찍은 것과도 같다. 게다가 그 대리인은 자신조차 협정문의 내용이 뭔지도 잘 모른다.
대한민국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엄중히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