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세 원더우먼... 덕분에 살았습니다

[내가 뽑은 올해의 인물] 이방인에게 지극한 사랑 베푼 오드리 할머니

등록 2011.12.20 16:06수정 2011.12.23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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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의 자동차 번호판은 '고양이와 개'.
카라의 자동차 번호판은 '고양이와 개'.한나영

고양이와 개의 엄마라 불리는 카라가 옆집에 이사왔다. 지난 7월의 일이다. 특수학교 교사인 카라는 혼자 살면서 개와 고양이를 반려자로 삼아 지낸다. 카라의 극진한 동물 사랑은 자동차 번호판만 봐도 알 수 있다. '고양이와 개.'


카라는 이사 오기 전부터 집수리를 대대적으로 했다. 그의 집 앞에는 낡은 주방 싱크대와 오래된 가구, 가전제품이 버려져 있었다. 낯선 트럭과 밴도 자주 눈에 띄었고 기술자들도 수시로 집을 들락거렸다. 벽을 타고 들려오는 공사 소음은 여름 무더위만큼이나 우리 식구들을 짜증나게 했다.

여름인데... 물이 안 나오네

그렇게 공사가 계속되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우리집 수도가 먹통이 된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에서 처음 경험하는 '단수'사태였다. 예고 없이 닥친 사태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받아놓은 물도 없었고 집에 있는 물이라고는 냉장고 안의 마실 물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큰일 났네. 샤워도 하고 화장실도 가야 되는데….'

갑작스러운 사태가 끔찍했지만 우선 상황 파악이 중요했다. 단수사태가 우리 집만의 문제인지 아니면 동네 전체의 문제인지.


"물 나와요?"

옆집에 사는 마가렛과 카라에게 물어봤다. 두 집 모두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집만 물이 안 나오는 것이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물이 안 나온다고 하자 카라는 "수도요금이 밀린 게 아니냐"고 물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당장 물 없이 지내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닥치자 마가렛과 카라는 자기 집에 와서 샤워도 하고 화장실도 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남의 집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차를 몰고 학교 스포츠센터로 갔다. 거기서 샤워를 하면서 단수 사태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유레카!"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상황이 정리가 되었다. 

'오늘 아침 카라네 집 앞에 미니밴이 주차돼 있었어. 밴 옆구리에는 'OO배관공'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지. 배관공이라고 하면 배관과 관련된 수도공사를 했을 거라고. 그가 공사를 하면서 우리집 수도관을 건드렸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우리집 수돗물이 안 나오는 것일 수도….'

나는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사처럼 그날 벌어진 일을 하나씩 끄집어내며 추리에 추리를 거듭했다. 그러다 배관공과 그의 미니밴을 떠올리게 됐고 우리집 단수 사태로까지 연결을 시키게 됐다. 물론 100% 신뢰할 수 있는 추리는 아니었지만 나는 내 추리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범인은 카라네 집에 다녀간 배관공?

먼저 마가렛을 만나 내 추리를 설명했다. 그리고 내 추리가 이치에 맞는지를 물었다. 마가렛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며 맞장구를 쳐줬다. 하지만 범인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이 나오게 하는 일이니 우선 수도국에 전화부터 하라고 했다.

날이 저물어 직원들은 이미 퇴근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언제든 수도국 사람이 출동한다고 들었다. 곧 바로 수도국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 다음 내 추리 속 범인인 배관공을 불러들인 카라에게로 갔다.

"오늘 아침 당신 집 앞에서 배관공 미니밴을 봤는데 무슨 공사를 했나요?"
"주방 싱크대랑 화장실 물이 시원찮아서 수도 공사를 했어요."

"(옳거니. 추리가 틀리지 않았어. 이럴수록 느긋하게 말해야지) 아까 말씀드렸듯이 우리집 물이 안 나오잖아요. 내 추측으로는 당신네 집 공사를 한 뒤로 물이 안 나오는 것 같은데 혹시 배관공이…."
"……."

"아침만 해도 물이 잘 나왔거든요. 샤워도 하고 설거지도 했으니까요. 집을 나서기 전 커피도 마셨고요."
"마지막으로 물을 썼던 게 몇 시였는데요?"

카라는 자기 집에 다녀간 배관공을 의심하는 내가 못마땅한 듯 형사 콜롬보처럼 정확한 시간을 물었다. 카라는 내 추리를 마뜩잖게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집 단수 사태를 설명하는 데는 이것 말고는 딱히 집히는 정황이 없었던 지라 카라도 자기 배관공에게 전화하겠다고 했다.

원더우먼 오드리의 등장

수도국에 전화도 했고 카라에게도 배관공 전화를 부탁한 뒤 나는 다시 마가렛에게 갔다. 친정엄마처럼 생각하는 83세의 마가렛이 내 상황을 궁금해할 것 같아서였다.

"나영, 오드리가 너랑 통화하고 싶대."
"오드리? 그게 누군데요?"

오드리는 마가렛 길 건너편에 사는 82세의 할머니였다. 시원시원한 목소리의 오드리는 내 상황을 마가렛에게 들었다며 혹시 자기가 도울 일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오드리는 나와 통화하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제시했다.

오드리는 그 방안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마치 선생님처럼 중간 중간에 "잘 듣고 있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너 지금 내 말 이해하고 있지?"라며 꼼꼼하게 체크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낯선 할머니. 그 할머니가 야밤에 이방인인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오드리는 이번 일이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된 양 발 벗고 나섰다. 너무나 고마웠다. 나는 오드리와 통화를 하면서 그의 따뜻한 마음만으로도 이미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다.

배관공과 야밤에 말싸움을 벌이다

마가렛 집에서 오드리와 통화를 마친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우리집 앞 도로 주변이 번쩍번쩍했다. 빨간 비상등이 돌아가는 수도국 트럭이 도착한 것이었다. 나는 수도국 사람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바로 그 때 배관공이 탄 미니밴도 도착했다. 배관공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난 아무런 잘못이 없어! 너희 집 수도관을 건들지 않았으니까!"
"나도 당신 말을 믿고 싶어. 하지만 이 상황에서 확실한 것은, 당신이 오늘 수도관 공사를 했고 우리집 수도는 먹통이 됐다는 사실이야.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나 기묘하지 않아? 당신이 만약 내 입장이라면 이런 정도의 추측은 가능할 거야. 그나저나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야?"

화통 삶아먹은 듯한 배관공의 큰 목소리에 기분이 나빠진 나도 덩달아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수도국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관공과 기분 나쁜 언쟁을 벌였다. 잠시 뒤, 배관공은 거칠게 몇 마디를 더 뱉고는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했다며 그냥 가버렸다.

현장에 남은 수도국 사람들은 손전등을 비춰가며 우리집 수도 장치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우리집 수도가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이 잠금장치를 풀자 금세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태는 예상외로 싱겁게 끝났다. 도대체 누가 우리집 수도를 잠궜을까.

사태가 마무리되자 수도국 사람은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내게 서명을 요구했다. 불빛에 비춰본 문서에는 자신들이 출동한 데 대한 비용 115달러를 추징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금세 115달러를 잃을 판이었다. 하지만 예외조항이 있었다. 만약 이번 일이 내 과실로 인한 거라면 내가 전액 부담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넌 잘못 없잖아... 내가 입증해 줄게

 82살 오드리 할머니가 선물로 가져온 포인세티아.
82살 오드리 할머니가 선물로 가져온 포인세티아.한나영

끔찍했던 단수 사태는 결국 6시간 만에 해결됐다. 수도국에 가서 내게 과실이 없음을 입증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만 어쨌건 물이 나오니 살 것 같았다. 나는 문제가 해결된 뒤 여러 모로 신경 써준 오드리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복숭아 바구니를 들고 갔다. 

"이런 거 받으려고 널 도운 게 아냐."

나는 오드리에게 배관공과 벌였던 언쟁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나보다 더 흥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디 숙녀 앞에서 그렇게 큰 소리를 치고 그래. 무례한 사람 같으니라고. 그나저나 내일 수도국에 가서 너의 과실 없음을 입증하려면, 그 사람들과 이것저것 따져야 할 텐데 내가 함께 가줄까?"
"그러면 고맙지만…."

다음 날, 오드리는 나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수도국에 가서 나의 과실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 주겠다고 나선 걸음이었다. 앞서가는 오드리 차를 뒤쫓아가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얘기 한 번 나눠보지 못한 이방인을 돕겠다고 저렇게 헌신적으로 나서는 걸까.

우리는 전날 수도국 사람이 알려준 대로 오전 8시에 도착했다. 하지만 수도국은 오전 8시 30분에 문을 연단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나머지 일은 내가 처리하기로 했다. 오드리가 그곳까지 와 준 것만 해도 너무나 황송하고 고마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더 이상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수도국에 들러 보니 우리집 단수 사태는 수도국 직원의 실수 때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새로 이사 온 카라네가 배관 공사를 하면서 자기네 수도를 잠가 달라고 했다는데 수도국 직원이 실수로 우리집 수도를 잠가버린 것이었다. 배관공을 의심했던 게 미안했지만 어쨌든 상황이 잘 풀려 다행이었다.

이제 얼마 후면 2011년도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지난 여름에 감동적으로 나를 도와줬던 오드리를 떠올렸다. 그래서 카드를 쓰고, 직접 만든 음식과 과일 바구니를 선물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든 '올해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며칠 뒤 오드리는 빨간 포인세티아 화분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잘 해 준 것도 없는데 내게 선물을 줘서 고마워.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런 거 받으려고 한 게 아니야. 알겠지? 그리고 언제든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나를 불러요."

덧붙이는 글 | '내가 뽑은 올해의 인물' 공모 기사


덧붙이는 글 '내가 뽑은 올해의 인물' 공모 기사
#올해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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