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이 숨 쉬는 언어의 박물관 같은 수필집

[서평] 최대봉 선생의 <낭만수첩>

등록 2012.01.10 09:10수정 2012.01.10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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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과 1950년대에 출생한 선배들과는 정서도 다르지만, 삶의 방식이나 생각하는 태도와 자세도 다른 것 같다. 1969년생이고 마흔네 살인 나는 수필이나 소설을 봐도 이젠 별로 감흥이 없다.

생활에 찌들고, 전쟁처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책을 읽고 감흥을 받기에는 너무 정서가 메말라있다. 그러나 1950년대 전후에 출생한 선배들은 너무 어렵고 힘든 시대를 살았지만, 1960~7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도 각박함을 잃지 않고 나름의 멋과 낭만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즘처럼 팍팍한 세상에 시를 이야기하고 수필을 쓰고 소설을 논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간혹 그 연배의 선배들을 만날 때면 어려운 시절을 살아왔음에도 대단한 낭만파들이 상당수 있음에 놀란다.

경북 영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설가이며 수필가인 최대봉 선생이 지난 3~4년 동안 독서와 유랑의 성과들을 하나로 모아 작은 수필집 <낭만수첩>을 지난해 말 출간했다.

낭만수첩  최대봉 작가의 수필집 낭만수첩 표지
낭만수첩 최대봉 작가의 수필집 낭만수첩 표지 도서출판 글나루
<낭만수첩>은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한 1960~70년대의 정서를 가득 담아 흘러간 옛 노래를 듣는 듯 맛과 멋이 있는 수필집이다. 가벼운 사랑이야기에서부터 지역의 당면한 현안문제까지를 별다른 막힘없이 술술 풀어 놓은 것이 재미난 것도 많고, 그리운 것도 가득 담은 책이다.

저자는 청소년기나 연애시절을 제외하곤 잘 쓰지도 않는 연애편지 이야기를 하면서 '청마 유치환은 196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뜰 때까지 이십 년 동안 젊은 과수댁 이영도에게 5000통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시조 시단의 거목이었던 이호우의 여동생이면서 역시 시조시인이었던 그녀가 딸아이를 데리고 살고 있던 수예점이 빤히 내다보이는 통영중앙우체국 창문 앞에서 절절한 그리움을 담아 쓴 청마의 편지는 이렇게 끝나기도 했다.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가을편지> 중)


이렇듯 변해가는 세상과 사랑을 말하면서 저자는 정이 가득 담긴 편지쓰기의 절실함을 말하고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음악인 팝페라의 대표곡인 <넬라판타지아>를 들으며 각박한 오늘날의 삶과 현실이 어렵고 힘들어도 이상과 꿈을 가지라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다.


 "환상 속에서 그 별은 언제나 반짝이고 있다, 이상향을 의미하는 말로 널리 쓰이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그리스 말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는 작지만 튼튼한 희망을 가지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그래도 어떤 이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있다.'"(<넬라판타지아> 중)

한편, 정통 클래식에서부터 영화음악, 대중가요 등을 전부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난 고전음악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유행가가 좋다. 내 인생은 얼마간의 '유치 뽕작'으로 이루어져 있고 나는 그 사실이 맘에 든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답했다지만 그게 모차르트가 아니고 조용필이나 나훈아나 혹은 심수봉이라고 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나의 '울트라 유치뽕짝' 음악 이야기> 중) 

저자는 이렇게 1950년대 생들의 소시민적인 음악 취향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누구나 고상한 것이 최고라고 생각을 하며 거들먹거리는 시대에 뽕짝을 좋아하는 자신이 촌스러운 정서를 당당하게 밝히는 용기가 대단하다. 

'영주사과'로 유명한 고향의 가을 사과 수확기를 맞이하여 쓴 <일곱 개의 사과> 이야기는 유별나게 맛이 나는 글이다.

"아담에게 첫 아픔을 준 사과는 사실 구약 창세기에는 사과라는 말은 없지만, 17세기 밀턴의 서사시 '실락원'을 통하여 사과라고 규정되어 남자들의 후두연골을 '아담의 사과(Adam's apple)라고 불리게 되었다. 두 번째 사과는 헬렌의 사과로 헤르메스 신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황금 사과를 주면서 이것으로 원하는 걸 얻으라고 말한다. 파리스는 절대 권력도 무한한 지혜도 마다하고 스파르타의 왕비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헬렌을 선택한다. 이로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고 서양 문명의 두 원류인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상징적 단초가 되었다.

세 번째 사과는 독재가 게슬러에 의해 아들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화살을 쏘아 맞혀야 했던 윌리엄 텔의 사과로 억압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이 상징이고, 네 번째 사과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로 이전과 이후로 우주관이 크게 바뀌었다. 다섯 번째 사과는 프로방스의 시골뜨기 화가 폴 세잔이다. 그의 그림 속 사과는 사물의 본질을 그리려했고, 그의 사과는 우리 입안에 침을 고이게 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말을 건네며 우리를 불편하게 했다. 보는 사람의 경험과 인식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의 모습을 표현하여 후일 피카소 등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여섯 번째 사과는 그림 형제의 동화에 나오는 '백설공주'의 사과로 매력적인 상상력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었고, 월트 디즈니가 최초로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어 '상상력도 돈이고 권력이다.'라는 말이 새로운 종교가 되게 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사과는 스티브 잡스의 사과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닝은 2차 대전 중 최초의 컴퓨터인 '콜로써스'를 만들어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전후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져 화학적 거세를 당한다. 사회적 비난과 냉대를 견디지 못한 그는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를 먹고 자살을 하게 된다. 앨런 튜닝은 바로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최초의 현대인이다. 또한 컴퓨터야 말로 신의 영역에 도전한 최초의 발명품이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사를 만들고 로고로 택한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는 바로 앨런 튜닝의 사과이다. 지금 세계인들은 그 일곱 번째 사과가 그려진 아이폰에 열광하고 있다. 사과 향 그윽한 계절이다."

정말 해박한 지식과 비유가 놀랍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묘한 표현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든다.

"매일 아침, 아프리카의 초원에서는 가젤이 잠에서 깨어난다. 사자보다 더 빨리 달아나야 하는 가젤은 필사적으로 달려야 한다. 가젤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하는 사자도 잠에서 깨어나 달린다. 그렇다. 당신이 가젤이든 사자든 아침에 일어나면 온 힘을 다해 달려야 한다." (<인간은 달린다> 중)

매일 달리고 뛰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달리는 인간의 운명을 저자는 너무나 태연하게 유능한 스승의 강의처럼 들려주고 있다.

"향기가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가슴 뛰게 멋진 일이다. 그게 국화꽃 향기일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향기를 떠올리면 한 여배우와 그녀의 영화 포스터가 떠오르는 것 왜일까? 한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여배우로서 국화꽃처럼 곧고 소박하고 맑고 순수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살다가 홀연히 떠나버린 여자, 장진영." (<국화꽃 향기> 중)

저자는 지역의 국화전시회를 둘러 본 소감을 국화향기처럼 아름답게 살다간 여배우를 추억하며 써 내려갔다. 나도 책을 읽으며 아련한 추억에 잠긴다.

"자전거를 타고 들길과 숲길과 마을 길을 달려보자. 속도의 편리함 때문에 놓쳐버린 세상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다던가? 인생은 자전가 타기와 같다고? 넘어지지 않으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자전거가 있는 풍경> 중)

<자전거 도둑>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기 위해 부자가 시내를 전부 돌다가 문득 축구장 앞에서 수많은 자전거를 발견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집으로 보낸다. 하지만, 이상한 느낌이 든 아들은 몰래 아버지가 자전거를 훔치는 모습을 발견하고 수많은 군중들에게 훔치는 모습이 들켜 몰매를 맞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돌아간 다음 홀로 울고 있는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의 눈물에 맺힌 현실을 보며, 나도 오늘 삶이라는 이름의 자전거 바퀴를 힘차게 굴린다.

고향의 영산인 소백산에 케이블카가 설치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은 작가는 이렇게 읊조린다.

"산(山)이란 한자는 세 개의 봉우리의 형상을 한 상형문자지만 그 소리는 베풀 선(宣)과 낳을 산(産)에서 차용해 온 것이다. 소백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해 나이 들거나 기운이 없어 산을 오를 수 없는 이들에게도 우리의 영산 소백의 주목에 핀 설화(雪花)나 봄날의 아름다운 철쭉 숲을 볼 기회를 베풀 것인지(케이블카 설치로 인한 관광 수입 같은 건 아예 얘기도 생각도 하지 말자),무분별한 개발로 오염되거나 병들게 해서는 안 될 소백산을 젊은 그대로 보존해야 할 것인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후니쿨리 후니쿨라> 중)

이처럼 지역의 산적한 문제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고민과 해법을 토로하는 중수필도 멋지게 쓰고 있다.

최대봉의 글을 1960~70년대의 잃어버린 감수성과 추억을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우리들 가슴 속에 남아있는 아련한 사랑의 이야기와 숨은 일상의 진실, 그리움, 아픔, 삶의 진솔한 정서, 생활의 고통, 친구, 술, 음악, 담배, 시, 연극 등 바쁜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잊고 살기 쉬운 많은 것들을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불러주는 노래와 같은 수필이다.

수필집 <낭만수첩>의 저자 최대봉 선생은 경북 영주시 출신으로 10대와 20대를 잡식성 독서와 유랑으로 보냈고, 30대와 40대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몇 권의 영어 학습서와 소설집 <그토록 삶이 가벼워지기까지>를 냈다. 최근 고향에서 공연된 단종임금 복위운동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의 극본을 쓰기도 하는 등, 소나무들 아래에서 독거하면서 틈틈이 글과 그림을 그리며 천천히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낭만수첩> (최대봉 씀 | 글나루 | 2011.12 | 1만3000원)


덧붙이는 글 <낭만수첩> (최대봉 씀 | 글나루 | 2011.12 | 1만3000원)

낭만수첩

최대봉 지음,
글나루, 2011


#낭만수첩 #최대봉 #도서출판 글나루 #경북 영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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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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