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모범생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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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모범생들>과 A외고 사건 모두 외고를 배경으로 한다. 사건사고가 거의 없는 외고에서의 부정행위란 점도 같다. 뿐만 아니라 그 부정행위의 주인공이 매우 의외의 인물이란 점까지 동일하다.
<모범생들>의 세 모범생 명준, 수환, 그리고 민영은 단정한 교복과 뿔테 안경, 그리고 책상에 앉은 모습이 잘 어울리는 '모범생들'이다. A외고에서 시험지를 훔친 학생 역시 평소 착실하고 성적이 전국 최상위권인 '모범생'이었다. 그런 모범생들이 무슨 이유로 부정행위를 한 걸까.
여기서 우리는 연극과 A외고 사건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공통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범생들'의 중심 인물인 명준이 고민 끝에 부정행위를 마음먹은 것은 '서울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A외고에서 시험지를 훔친 학생 역시 서울대에 대한 부담이 매우 컸다.
본래 시험의 목적은 학습의 과정 중 성취 정도를 파악하는 데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교육학 수업 시간에나 어울릴 비현실적인 얘기다. 대한민국에서 시험의 가장 중요한 지향점은 '대학'이 돼버린 지 오래다. 특히 '외국어 특수 목적 고등학교'는 '입시 특수 목적 학원'의 준말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입시 중심의 교육을 한다. 또 서울대는 신입생 선발 시 중간, 기말고사의 전 과목을 높은 비율로 반영한다.
이런 상황에서 A외고 학생의 시험지 절도 사건에는 단순히 시험을 잘 보고 싶은 것뿐 아니라 내신 상위권 등급을 확보해 서울대에 '안전하게' 입학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서울대에 대한 바람' 이면에는 연극에서처럼 상위 3% 또는 상위 0.3%에 대한 바람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상위 0.3%를 꿈꾸는 아이들연극 <모범생들>, 조금 불쾌했다 |
연극 <모범생들>에서는 공부 못하고 싸움질만 하고 다니는 종태와 민준, 수환, 민영이라는 세 모범생들을 대조적으로 그린다.
'똑똑한' 아이들은 부정행위가 드러났을 때 종태를 설득해 모든 것을 뒤집어쓰게 하는데 순순히 이를 받아들인 종태는 마지막에 커닝을 거부함으로써 '비도덕적인 모범생'이 아닌 '도덕적인 문제아'를 택하게 된다. 그리고 10년 뒤 성공한 엘리트 민준들 앞에서 종태는 말한다.
"나? 그냥 카센터 하고 있어. 난 그냥 땀흘린 만큼만 벌고 있어."
그런데 이 대사에서 나는 심한 거부감이 생겼다. 작가는 '폭력적이고 무식한 문제아 종태보다 백색 누아르를 펼치는 나쁜 엘리트들이 더 무섭다'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완전히 공감은 안 됐기 때문이다.
각각 회계사와 보좌관과 검사가 된 이들은 고시 패스 등을 통해 어쨌든 자신의 노력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종태의 카센터는 돈 많은 부모님을 통한 성취다. 더욱이 종태는 외고에 '잔디 깔고' 들어온 것으로 설정돼 있다. 그렇다면 종태를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아', '공부는 못하지만 착한' 캐릭터로만 볼수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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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모범생들>에서 명준은 '상위 3%의 내신'을 위해 커닝을 시도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상위 3%의 인생'에 있다. 상위 3%가 되기 위해선 '적성도, 흥미도 필요 없이' 어떤 학과든 서울대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상위 3%의 내신이 필요하다.
연극 속에서 반장 민영은 명준보다 더 높은 꿈을 갖고 있다. 명준이 민영에게 함께 커닝을 하자고 제안했을 때 민영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는데 그건 커닝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민영은 말한다.
"난 너희와는 태생이 달라. 3%? 나는 0.3%야! 너희들이 군대갈 때 나는 어학연수 갈거고, 너희들이 취직하면 난 회사를 차릴 수도 있어. 너희가 적금 부을 때 나는 그 적금 만기액 만큼의 연봉도 받을 수 있어. 어쩌면 나는 슈퍼맨도 될 수 었어! 교문 밖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것 같냐?"말 그대로 민영의 성적은 상위 0.3%다. 게다가 명문가의 아들이란 배경까지 갖고 있다. 급이 달라도 한참 다른 민영은 커닝에 있어서도 급이 달랐다. '세 장'의 돈을 주고 시험지를 매수해온 것이다. 이런 민영에 비하자면 명준과 수환의 수신호 커닝은 귀엽기까지 하다. 이렇듯 태생이 다르고 '급'이 다른 민영은 누구와도 손을 잡을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결국 연극 속 모범생들이 단정하고 착실하게 공부하는 이유, 모범생인 이유는 정해진 어떤 수준의 삶을 살기 위해, 즉 특정 계층에 오르기 위해서다. 그들에게 있어 학교, 공부, 시험의 존재 목적은 계층 상승 또는 유지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들이 부정행위를 하면서까지 그토록 시험 점수와 등수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다.
A외고 모범생에게 엄중한 처벌이 필요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