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최전방 고대산 정상 OP에서 근무하는 초병들의 모습이다.
윤도균
내 나이 스물여섯 되던 해 12월, 내 친구들은 이미 전역하고 결혼해 자식을 낳아 키우는데 나는 1969년 12월 3일부로 뒤늦게 입대 영장 통보를 받았다. 나의 군 징집이 그렇게 늦어진 배경은 모두다 그때나 지금이나 호시탐탐 남침 야욕을 꿈꾸는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청와대 습격" 명령을 받고 남파된 김신조 (31명) 일당의 1968년 1·21사태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다 내가 7살 때 6·25전쟁으로 외가댁 마을로 피난을 나올 때 나의 고향 본적지 면사무소가 불타버려 우리 가족은 호적이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이 피난처에 새로 호적을 만드는데 그때 우리 동네 이장이셨던 큰 외삼촌께서 아무게 네가 군대 갈 때까지 우리나라 평화가 안 되면 또다시 전쟁이 날 것이라 말씀하시며 마치 인심이라도 쓰시듯 내 나이를 실제 나이보다 2살이나 줄여 새로운 호적을 만들고 '도민증'을 만들어주셨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내가 성장해 군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신체검사도 현역병 입영도 동네 친구들보다 모두 2년씩 늦었다. 그런데다 그 시절은 군 병력 자원이 남아돌아 신체검사 하고 곧 바로 영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보충역에 편입되어 2년 뒤 입영영장이 1년 앞두고 미리 나오더니 이마저 입대 한 달여 앞두고 무슨 이유인지 취소되고 말았다.
그래서 면사무소 병사계에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내 뜻과 상관없이 현역병 입영 자원이 넘쳐 어쩌면 군에 가지 않게 될 것 같다고 한다. 그러던 중 예상치 않게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를 기습 사건으로 우리나라는 전국에 '군경 비상령'이 내려지고 그 일로 인하여 나는 뒤늦게 현역병 징집이 되어 1969년 12월 3일 우리 나이 스물여섯 살 12월에 입영을 했다.
인천에서 입영 열차를 타고 살을 에듯 싸늘한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밤을 밤새도록 달려 논산훈련소 보충대에 입소했다. 그 캄캄한 밤중에 나보다 불과 하루 이틀 먼저 입소한 장병들이 머리를 빡빡 깎고 있었다. 희미한 남풋불 아래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내무반장이란 작자가 사시나무 떨 듯하는 우리들에게 보충대 마루 밑에 쥐가 많다며 너희들이 마루 밑에 기어들어가 쥐를 한 마리씩 잡으라고 "실시"를 외친다.
그러다 보니 하도 의기당당한 내무반장 기세에 주눅이 들어 입소장병들 너도나도 하나같이 겁을 먹고 정신이 혼비백산된 가운데 침상 밑에 기어들어가 낑낑거리며 쥐를 찾는다. 하지만 '아닌 밤중에 홍두깨 두드리는 격'이지 하루에도 수백 명씩 드나드는 보충대 침상 밑에 무슨 놈의 쥐가 있단 말인가?
그런 줄도 모르고 겁에 질린 입소장병들 하나같이 침상 밑에 기어들어가 우왕좌왕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충대 내무반 바닥에 입소장병들 주머니에 있던 귀중품이 지천으로 나뒹군다. 그러면 이 기회를 놓칠세라 논산 훈련소 보충대 기간병과 내무반장들이 '불로소득' 재미를 톡톡 보던 시절이었다.
아마 그 시절 보충대 기간병과 내무반장들은 어림잡아도 하루 수십만 원 수입도 더 챙겼을것이다. 그런데도 그 시절은 육군훈련소 보충대에서 공공연하게 그런 비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성행하고 있는데도 누구 한 사람 이들의 고질적인 만행을 제지하지 않고 윗사람들이 이런 비리를 눈감았던 시절이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
그런데 더 웃기는 일은 그렇게 주머니 귀중품을 너나 할 것 없이 몰수당하고도 누구 한 사람 감히 돌려달라고 말 한마디 못했다. 그렇게 처당과 지옥을 오가는 무시무시한 밤이 지나고 새 날이 밝으니 기간병들이 입소장병을 모아놓고 펜 글씨 잘 쓰는 사람 나오라는 주문을 한다. 나는 입대 전 펜글씨를 잘 쓰는 편이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입대한 입영 동기들이 무슨 자랑처럼 날 펜글씨 잘 쓴다고 추천해 나는 보충대 생활 3일간 늘 행정반에서 행정 업무 보조를 하게 되니 나름대로 몸은 편하고 배곯지 않았다. 헌데 한 가지 아쉬움은 나와 함께 입대한 동기들은 모두 나보다 하루 먼저 논산훈련소로 팔려간 것이었다. 초조해진 나는 중대 기간병들에게 왜 난 배치를 안 시켜 주느며 빨리 보내달라고 주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