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파범' 김현희씨, 누가 무례합니까

등록 2012.04.03 15:51수정 2012.04.0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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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다. 대학교 학부생 시절, 통일부가 주최했던 대학생 통일논문 공모전에 참여한 적이 있다. 운이 좋게도 우수상에 입선하였는데, 시상식을 며칠 앞두고 논문의 일부 내용을 수정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나는 거절했고, 통일부는 입선을 취소시켰다.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김현희-KAL858기 사건'의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한 부분이었다. 나는 이 과정에서 얼마 동안 신경쇠약 증세로 고생하며 괴롭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른바 '진실'에 대한 온갖 생각이 나를 덮쳤다. 정말로 이 사건이 조작되서 그런 것인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KAL858기 사건, 나의 경험

나는 두려웠다. 내가 김현희 사건의 재조사를 언급했다는 말을 사람들에게 꺼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이 나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수정을 거부했던 것은 정당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뒤부터 내가 겪은 일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아울러 사건과 관련해 계속 인연이 있었는지, (주로 연구자 정체성을 가지고) '진상규명' 운동에 함께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이 사건이 북쪽의 테러인지 남쪽의 조작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잘모르겠다. 다만 기존 공식수사 결과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고, 따라서 철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 이 사건이 2003년 심재환 변호사의 발언 중 MBC < PD수첩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다시 확인하는 계기로 논란이 되고 있는 듯하다. "김현희는 가짜"라고 했던 발언이 그가 '주사파'라는 근거 중의 하나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는 동반자 관계인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주사파라는 맥락에서도 이야기되고 있는 듯하다.

사건에 대한 이야기 방식

무엇보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사건이 논의되고 있는 방식에 일정 정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이 사건은 진실의 문제보다는 '고통'의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비행기와 함께 사라진 115명의 고통이 어떻게 안보정치에 활용되는가. 안기부수사결과에 문제가 있다며 진상규명 활동해 온 가족들의 고통은 왜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못하는가.


'폭파범'의 입장에서 김현희씨의 고통은 어떻게 인용되고 해석되는가. 그리고 진실의 문제관련해서는, 그 '실체'라는 것이 어떤 증거와 진술로 밝혀낼 수 있다는 전제 자체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증거의 문제가 아니라 그 증거를 둘러싼 해석과 정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김현희 사건에 대한 논의들이 '고통'의 문제과 '진실개념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이 글에서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들 관련해 조심스럽게 나의 고민을 나눠보려고 한다.

먼저, "김현희는 가짜"라는 이야기는 큰 틀에서 기존 안기부 수사결과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는 재조사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사건의 재조사 요구가 '주사파' 내지 '친북'의 논리로 이어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심재환 변호사를 논문 관련해 면접한 적이 있는데(2009년), 그에 따르면 오히려 북쪽의 책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도 재조사가 필요하다. 북쪽은 사건 발생 이후부터 공식적으로 그 책임을 부인해왔기 때문에 이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라도 재조사가 필요한 것이다.

'주사파', '친북'은 색깔론

따라서 재조사가 주사파 또는 친북의 논리로 이어지는 것은 부당하다. 이는 전형적인 '색깔론'이다. 나아가 '실종자' 가족들을 포함해 재조사를 요구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 사건이 당시 남쪽 군사정권의 조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실제로 그렇게 믿을 수도 있겠지만) 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물음이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건에 대한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그리고 정부가 수사 결과의 문제점을 성실히 해명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이는 실종자 가족과의 면접에서도 직접 확인했다). 나아가 사건에 대한 의문은 외국 정부의 비밀문서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그동안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좀 더 알아볼까 한다.

외국의 비밀문서

미 중앙정보국 비밀문서에 따르면, 당시 북쪽이 올림픽을 겨냥한 것이었다면 왜 그렇게 빨리 테러를 했는지 의문이라고 되어 있다(88. 2. 2 /88. 4. 1).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사실 이 올림픽에 대한 의문을 처음 제기한 쪽은 당시 통일원(지금의 통일부)이었고(87.12. 4), 미 국무부도 이 동기 부분이 의문이라고 적고 있다(87. 12. 7).

또한 당시 제임스 릴리 주한 미대사는 김현희 진술의 신빙성 관련해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했느냐고 묻기도 했다(88.1. 14). 영국 외무부 비밀문서에서도 김현희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대한 의문이 발견된다(88. 1. 15). 호주 외무부 비밀문서에도 역시 김정일 친필지령에 대한 증거가 있는지 등에 대한 조심스러운 흔적이 남겨있다(88. 1. 15). 물론 기본적으로 이 정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남쪽의 수사결과를 받아들였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핵심은, 공식 수사 결과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 안에는 설명되지 않는 여러 문제점들이 있다는 것이다.

'폭파범' 김현희씨의 경우, 당사자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할 것이다. 자신이 폭파범이라고 고백했는데도 왜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인가. '진실'을 말했는데도 왜 믿어주지 않는 것인가. 지금까지 제기됐던 김현희씨 진술의 모순점들은 당사자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실수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아울러 진실이야 어찌됐든, 그녀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겪고 있을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 안쓰럽게 생각한다.

115번...

문제는 자신이 진실을 말했다면, 그리고 그 진실을 증언할 유일한 생존자로 사형을 면했다면, 재조사가 진행되었을 당시 국정원발전위원회 및 진실화해위원회에 적극 협조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특히 국정원 재조사의 경우 공식 수사결과가 맞다는, 곧 사건의 진실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많이 인용되는데, 이 결론이 폭넓게 공감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핵심당사자에 대한 조사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현희씨는 큰 맥락에서 재조사를 주장하는 심재환 변호사에 대해 "참 무례하다"고 말했다(<조갑제닷컴>). 그녀가 폭파범이라고 믿고 있는 어느 실종자 가족에 따르면, (미안하지만 그대로 옮기자면) 그녀는 "115번 죽어야 할" 테러범이다. 다시 말해,115번이라도 재조사에 응했어야 했다. 누가 무례한가.

덧붙이는 글 | < KAL858, 진실에 대한 예의: 김현희 사건과 '분단권력' >(선인)의 저자입니다. 사건과 관련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KAL858, 진실에 대한 예의: 김현희 사건과 '분단권력' >(선인)의 저자입니다. 사건과 관련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현희 #KAL858 #심재환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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